[代를 잇는 家嶪] (7) 한진공예사 ‥ "100년 벼루匠人기술 일본에 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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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균 60여개 수작업 … 일본인 관광객에 인기
뱅운상석으로 만든 작품 개당 60만 ~500만원
요즘엔 가훈 새긴 가보벼루 주문 많이 들어와
"아버지 밑에서 7살 때부터 배운 벼루 인생이 벌써 60년이 넘었지.당시 친구들로부터 돈도 안되는 것 만들어서 뭐하냐고 핀잔을 들었지만 이미 천직이 된 지 오래입니다."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에서 100여년간 가업으로 벼루를 제작하고 있는 한진공예사.이 회사의 서암(書岩) 김진한 대표(68)는 충남 무형문화재 6호이자 석공예 분야 대한민국 명장으로 우리나라 대표적 벼루인 남포벼루의 맥을 잇는 장인이다.
남포벼루는 보령 남포지역의 돌로 만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문헌에도 우수성이 기록돼 있으며 보물 547호인 추사 김정희의 벼루 세 개 중 두 개가 남포벼루일 정도로 성가가 높다.
김 대표가 지금까지 만든 벼루는 수만점이 넘는다.
일일이 정이나 끌,망치 등으로 깎고 새겨서 만든 각연(무늬를 넣어 조각한 벼루)만 1만여점에 달한다.
이 가운데 역대 대통령 등 유명 인사들에게 증정한 것 등 작품성이 우수한 것만도 1000여점에 이른다.
김 대표의 아들 성수씨(37)도 벼루 제작을 익히고 있어 가업이 4대째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 기술전수=김 대표 집안의 남포벼루 제작은 조선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대표의 할아버지 고 김형수옹은 20세이던 1890년께 충남 서천에서 보령으로 이사와서 터를 잡았다.
어려운 살림살이로 움막에서 생활하면서 맷돌 벼루 등을 만들어 시장과 서당에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조각 솜씨가 뛰어났던 김 대표의 아버지 김갑용씨(1970년 작고)는 17세 때부터 김형수옹과 함께 사대부 가문의 주문을 받아 각연을 제작했다.
김 대표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잠시 머무르면서 일본인들에게 벼루 제작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또 보령 청라보통국민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벼루 제작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김 대표는 전했다.
고인은 정식 인간문화재 제도가 도입되기 이전인 1940년대 이미 이 지역에서 남포벼루 인간문화재로 인정받았다.
◆벼루 인생 60년=김 대표는 5형제의 둘째로 7살 때부터 아버지 공방에서 벼루 제작을 구경하면서 벼루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아버지가 벼루를 만드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직접 만들어 보고 싶어 아버지가 계시지 않을 때마다 몰래 공방에 들어가 작업 중이던 벼루를 만지다 망가뜨린 경우가 수없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당시 부모로부터 '공부나 열심히 하지 벼루가 뭐냐'는 꾸지람을 들었지만 벼루 만드는 것이 마냥 좋았다.
결국 아버지는 '그놈이 소질이 있는 것 같다'며 중학생이던 14살 때부터 정식으로 기술을 전수해줬다.
이미 김 대표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마을 인근의 백운사 뒷산인 성주산에서 벼루에 쓸 돌을 캐어 날랐으며 이 같은 경험을 통해 어떤 돌이 벼룻돌로 좋은지를 가늠하는 안목을 키웠다.
김 대표는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전통 조각 솜씨에 스스로 익힌 독창성을 가미해 보다 뛰어난 벼루를 만들고 있다.
"좋은 벼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단단하고 우수한 돌을 고르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그가 만든 벼루가 품질을 인정받는 것은 무엇보다도 남포석 가운데서 최상급인 백운상석(白雲上石,원석에 흰구름 무늬가 있고 단단한 돌)만 골라쓰기 때문이다.
백운상석으로 만든 작품성 있는 벼루는 개당 최소 60만원에서 500만원에 이른다.
백운상석은 부드럽고 단단하며 돌결이 윤기와 온기를 갖춰 먹을 갈면 벼루 바닥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들고 먹물이 오래 유지된다.
반면 중석(中石)과 하석(下石)은 돌이 물러 소리가 둔탁하며 먹을 갈면 찌꺼기가 생기고 먹물도 금방 사라진다.
백운상석은 한진공예사 소유인 성주산 연석광구에서 캔 것이다.
◆역대 대통령 선물용 벼루 제작=김씨는 5명의 직원들과 함께 월 평균 60여개의 벼루를 만들고 있다.
벼루는 모두 주문에 의해 수작업을 통해 제작된다.
그는 "마음을 집중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날카로운 끌이나 정에 손을 다치기 일쑤"라며 상처난 손을 내보였다.
김 대표의 손끝에서 끌이 움직일 때마다 마치 벼루에서 학(鶴)이 꿈틀거리며 날아오를 것처럼 보였다.
"요즘은 벼루 수요가 줄어 매출은 연간 약 1억원에 불과하지만 전통가업인 벼루 제작 기법을 잇는다는 자부심을 갖고 벼루를 만들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한진공예사는 요즘 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일반벼루는 거의 만들지 않고 가보벼루,특수벼루 등을 제작하고 있다.
"정년퇴임한 분들이 서예에 관심을 보이면서 벼루 뒷면에 가훈을 써서 후손에 남기기 위해 가보벼루를 많이 주문해 오고 있어요." 가보벼루는 그가 일일이 손으로 조각한다.
지금까지 그가 만든 가보벼루는 300여개에 달한다.
이들 제품은 개당 150만~200만원가량 한다.
김 대표의 벼루 명성은 일본에도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가끔 일본인 관광객들이 버스를 대절해 들르곤 한다고 그는 말했다.
김 대표는 박정희에서 노무현까지 역대 대통령의 선물용 벼루를 모두 만들었다.
"대통령 선물용 벼루는 특별주문을 받아서 만드는데 용 봉황 천지 지도모양 송학월연 등의 문양이 있어요." 가격은 개당 500만원 선으로 알려졌다.
또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천주교 측의 요청으로 지구 형상을 담은 둥근 형태의 벼루를 만들기도 했다.
김 대표는 "이처럼 작품성 있는 벼루는 제작하는 데 최장 1개월 이상 걸린다"고 밝혔다.
김후진 기자 jin@hankyung.com
뱅운상석으로 만든 작품 개당 60만 ~500만원
요즘엔 가훈 새긴 가보벼루 주문 많이 들어와
"아버지 밑에서 7살 때부터 배운 벼루 인생이 벌써 60년이 넘었지.당시 친구들로부터 돈도 안되는 것 만들어서 뭐하냐고 핀잔을 들었지만 이미 천직이 된 지 오래입니다."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에서 100여년간 가업으로 벼루를 제작하고 있는 한진공예사.이 회사의 서암(書岩) 김진한 대표(68)는 충남 무형문화재 6호이자 석공예 분야 대한민국 명장으로 우리나라 대표적 벼루인 남포벼루의 맥을 잇는 장인이다.
남포벼루는 보령 남포지역의 돌로 만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문헌에도 우수성이 기록돼 있으며 보물 547호인 추사 김정희의 벼루 세 개 중 두 개가 남포벼루일 정도로 성가가 높다.
김 대표가 지금까지 만든 벼루는 수만점이 넘는다.
일일이 정이나 끌,망치 등으로 깎고 새겨서 만든 각연(무늬를 넣어 조각한 벼루)만 1만여점에 달한다.
이 가운데 역대 대통령 등 유명 인사들에게 증정한 것 등 작품성이 우수한 것만도 1000여점에 이른다.
김 대표의 아들 성수씨(37)도 벼루 제작을 익히고 있어 가업이 4대째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 기술전수=김 대표 집안의 남포벼루 제작은 조선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대표의 할아버지 고 김형수옹은 20세이던 1890년께 충남 서천에서 보령으로 이사와서 터를 잡았다.
어려운 살림살이로 움막에서 생활하면서 맷돌 벼루 등을 만들어 시장과 서당에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조각 솜씨가 뛰어났던 김 대표의 아버지 김갑용씨(1970년 작고)는 17세 때부터 김형수옹과 함께 사대부 가문의 주문을 받아 각연을 제작했다.
김 대표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잠시 머무르면서 일본인들에게 벼루 제작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또 보령 청라보통국민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벼루 제작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김 대표는 전했다.
고인은 정식 인간문화재 제도가 도입되기 이전인 1940년대 이미 이 지역에서 남포벼루 인간문화재로 인정받았다.
◆벼루 인생 60년=김 대표는 5형제의 둘째로 7살 때부터 아버지 공방에서 벼루 제작을 구경하면서 벼루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아버지가 벼루를 만드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직접 만들어 보고 싶어 아버지가 계시지 않을 때마다 몰래 공방에 들어가 작업 중이던 벼루를 만지다 망가뜨린 경우가 수없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당시 부모로부터 '공부나 열심히 하지 벼루가 뭐냐'는 꾸지람을 들었지만 벼루 만드는 것이 마냥 좋았다.
결국 아버지는 '그놈이 소질이 있는 것 같다'며 중학생이던 14살 때부터 정식으로 기술을 전수해줬다.
이미 김 대표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마을 인근의 백운사 뒷산인 성주산에서 벼루에 쓸 돌을 캐어 날랐으며 이 같은 경험을 통해 어떤 돌이 벼룻돌로 좋은지를 가늠하는 안목을 키웠다.
김 대표는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전통 조각 솜씨에 스스로 익힌 독창성을 가미해 보다 뛰어난 벼루를 만들고 있다.
"좋은 벼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단단하고 우수한 돌을 고르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그가 만든 벼루가 품질을 인정받는 것은 무엇보다도 남포석 가운데서 최상급인 백운상석(白雲上石,원석에 흰구름 무늬가 있고 단단한 돌)만 골라쓰기 때문이다.
백운상석으로 만든 작품성 있는 벼루는 개당 최소 60만원에서 500만원에 이른다.
백운상석은 부드럽고 단단하며 돌결이 윤기와 온기를 갖춰 먹을 갈면 벼루 바닥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들고 먹물이 오래 유지된다.
반면 중석(中石)과 하석(下石)은 돌이 물러 소리가 둔탁하며 먹을 갈면 찌꺼기가 생기고 먹물도 금방 사라진다.
백운상석은 한진공예사 소유인 성주산 연석광구에서 캔 것이다.
◆역대 대통령 선물용 벼루 제작=김씨는 5명의 직원들과 함께 월 평균 60여개의 벼루를 만들고 있다.
벼루는 모두 주문에 의해 수작업을 통해 제작된다.
그는 "마음을 집중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날카로운 끌이나 정에 손을 다치기 일쑤"라며 상처난 손을 내보였다.
김 대표의 손끝에서 끌이 움직일 때마다 마치 벼루에서 학(鶴)이 꿈틀거리며 날아오를 것처럼 보였다.
"요즘은 벼루 수요가 줄어 매출은 연간 약 1억원에 불과하지만 전통가업인 벼루 제작 기법을 잇는다는 자부심을 갖고 벼루를 만들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한진공예사는 요즘 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일반벼루는 거의 만들지 않고 가보벼루,특수벼루 등을 제작하고 있다.
"정년퇴임한 분들이 서예에 관심을 보이면서 벼루 뒷면에 가훈을 써서 후손에 남기기 위해 가보벼루를 많이 주문해 오고 있어요." 가보벼루는 그가 일일이 손으로 조각한다.
지금까지 그가 만든 가보벼루는 300여개에 달한다.
이들 제품은 개당 150만~200만원가량 한다.
김 대표의 벼루 명성은 일본에도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가끔 일본인 관광객들이 버스를 대절해 들르곤 한다고 그는 말했다.
김 대표는 박정희에서 노무현까지 역대 대통령의 선물용 벼루를 모두 만들었다.
"대통령 선물용 벼루는 특별주문을 받아서 만드는데 용 봉황 천지 지도모양 송학월연 등의 문양이 있어요." 가격은 개당 500만원 선으로 알려졌다.
또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천주교 측의 요청으로 지구 형상을 담은 둥근 형태의 벼루를 만들기도 했다.
김 대표는 "이처럼 작품성 있는 벼루는 제작하는 데 최장 1개월 이상 걸린다"고 밝혔다.
김후진 기자 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