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훈 < 한미파슨스 대표 jhkim@hanmiparsons.com >

'건축은 건축주의 거울'이란 경구가 있다.건축물은 그 주인의 역량과 자질대로 지어진다는 의미다.역사를 돌이켜봐도 훌륭한 건축물 뒤에는 반드시 그에 걸맞은 건축주가 있었다.

건설사업에서 발주자의 역할이나 리더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발주자는 최종 의사결정권자이자 자금 집행자이며,건설생산 전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게임의 법칙을 제정,운용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훌륭한 발주자가 갖춰야 할 덕목은 뭘까.

먼저 훌륭한 발주자는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할 줄 안다.더 나아가 전문가를 효과적으로 다루고 활용하는 방법을 알고,그들의 조언을 경청한다.만약 어느 발주자가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자신의 능력이나 역할의 한계를 넘어 전문가 영역까지 침범하려 들 때 그 건축물이 어떻게 지어질지는 자명해진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건설 발주자는 정부와 공공부문이며,동시에 정부는 법규나 제도를 통해 시장의 원칙을 설정하는 역할도 담당한다.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가진 정부나 공공발주자가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에서 건설산업의 경쟁력을 기대할 수는 없다.건설산업의 수준은 발주자의 수준을 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가장 먼저 깨우친 나라가 영국이다.영국은 건설산업의 많은 문제점이 공공발주자들의 잘못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건설산업의 부정적인 행태는 발주자의 거울'이란 경구를 자기 혁신을 위한 구호로 삼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정반대다.정부에서 건설산업의 문제점 해소나 경쟁력 향상을 위해 수립하는 정책들을 보면 하나같이 건설업계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이러한 상황 인식은 문제아(건설산업계)만 탓하고,그보다 더 문제가 많은 부모(정부 및 발주자)나 가정환경(건설환경)은 애써 외면하는 격이다.

그야말로 사안의 본질을 호도하는 처사다.

국제적인 잣대를 놓고 볼 때 우리 건설산업의 경쟁력이나 질적인 수준은 낙후돼 있다.산업 기반이나 국민들의 인식도 취약하다.이 같은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건설 주체들이 남을 탓하기 전에 자기 반성과 함께 글로벌 스탠더드를 수용하는 혁신을 통해 거듭나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발주자의 리더십이다.

발주자가 바로서야 바람직한 건설문화가 형성되는 것은 역사에서도 입증된 바 있다.르네상스 시대의 찬란한 건축문화 유산도 훌륭한 발주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되새겨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