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자동차는 최근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생산 설비를 '매각 후 재리스(sale & lease back)'하기로 결정했다.

2년 연속 영업적자에다 부채(해외분 포함)가 9조원에 달해 운영자금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영 개선 방식은 그러나 노조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될 뻔 했다.

고용 안정을 위협할 수 있다는 이유로 노조는 이 아이디어를 낸 임원을 좌천시키라는 요구까지 했다.

집단행동을 무기로 '권력'을 키워온 노조가 인사ㆍ경영권에까지 깊숙이 개입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회사에서는 성과에 따른 보상체계 역시 도입할 수 없다.

현대차는 요즘 일감이 넘치는 공장과 일감이 없는 공장 간의 생산량 조정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울산 1공장 노조원들은 지난달 초 휴일특근과 잔업을 보장하라며 작업을 거부했다.

일감이 넘치는 3공장 근로자들은 지난 5∼6일 이틀간 신차 생산 물량을 더 달라며 특근을 거부했다.

일감을 많이 확보해 놓고 보자는 심사다.

일감을 놓고 노노 간 갈등이 확산되는 상황이지만 인력 전환배치는 노조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회사 측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정상 궤도를 벗어난 지 오래다.목소리가 커야 이긴다는 '고성불패(高聲不敗)' 인식은 한국 노동 현장에 넓게 퍼져 있다.

노조는 협상 때마다 근로 조건이 아닌 무리한 요구들을 제시해 경영진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금속노조 지도부는 지난해 6월 우리나라 자동차산업 등에 도움이 될 한·미 FTA 협정 체결을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해 해당 기업은 물론 국민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항운노조를 비롯 현대ㆍ기아차,교보생명 노조 간부는 채용 또는 회사 운영 매장 계약 등에 개입해 금품을 수수하다 적발되기도 했다.

박영범 한성대 교수(경제학)는 "목소리만 높이면 통하는 '목소리효과(voice effectㆍ고성불패)' 때문에 노조의 잘못된 행태가 고쳐지지 않는다"며 "경영진이 단기적으로 큰 손실을 입더라도 노조의 부당한 요구를 끝까지 들어주지 말아야 노동운동이 바로 잡힐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조의 떼쓰기식 파업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수치로도 나타나고 있다.

현대차는 1987년 노조 설립 이후 20년 동안 파업으로 인해 351일 동안 생산 시설을 놀려야 했고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10조8512억원에 달했다.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정치성 파업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투쟁의 선봉에 섰을 정도다.

여러 갈래로 나눠진 노조 내 계파는 또 다른 노사 갈등 요인이다.민주노총은 온건노선의 국민파와 강경노선의 중앙파 및 현장파로 갈려 주도권 싸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노동운동의 본질을 투쟁에서 찾는 강경파들은 사회적 대화조차 거부,국민파가 추진하는 노사정위원회 가입을 가로막고 있다.

정부의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도 노동운동을 왜곡시키고 있다.

지난해 초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은 정부로부터 합법 파견 판정을 받은 KTX 여승무원들이 철도공사의 직접고용을 주장하며 파업을 벌이자 "사회적 갈등을 빚는 노사 분규는 정부가 해결해 줄 필요가 있다"고 말해 노조의 파업을 부추겼다.

이러다 보니 국내 자본은 파업을 피해 중국 등 제3국으로 빠져나가고 있다.외국 자본도 노사 갈등이 없는 나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매년 발표하는 노사 관계 경쟁력에서 우리나라는 몇 년째 최하위권을 맴돌고 있다.2006년 현재 국가경쟁력은 38위인데 노사 관계 경쟁력은 그보다 23단계 더 아래인 61위를 기록하고 있다.

왜 노동운동이 이 지경까지 왔나.노동전문가들은 법과 원칙의 실종을 그 이유로 든다.불법 파업 같은 잘못된 행위에 대해 정부나 기업이 강력히 대응하지 못해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노조의 의식도 삐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박영범 교수는 "법을 집행하는 정부가 일관성 있게 불법 파업에 대응한다면 노동 현장의 질서는 지금보다 훨씬 안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한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노동운동가들의 자세 변화를 주문했다.그는 "무한 경쟁 체제에 기업 수명이 짧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노조가 책임있는 경제 주체라는 자각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며 "그래야 노조도 기업의 생산성과 일자리 창출에 관심을 기울이고 무책임한 파업도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