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 시인 >

세상이 벚꽃으로 뒤덮이는가 하더니,봄비가 다녀 간 후 벚나무 아래에는 꽃잎들이 낭자했다.

그걸 아쉬워 할 겨를 없이 배나무 가지마다 꽃망울들이 일제히 터진다.

내 거처가 있는 곳은 유난히 배밭이 많아 어디가나 배꽃이다.

뜬세상 사는 일에 더러 보람과 기쁨도 없지 않았지만 어찌 실의와 곤궁이 빠질리야! 내일은 배밭과 배밭이 이어지는 곳을 실의와 곤궁을 벗삼아 발목이 시도록 걸어야겠다.

배꽃 바라보며 걷노라면 눈에 백태라도 낀 듯 세상이 다 부옇게 보이겠다.

이백은 '산중문답(山中問答)'에서 '어찌하여 푸른 산에 사냐 묻길래/웃고 대답 아니해도 마음 절로 한가롭네./ 복사꽃 흐르는 물 아득히 떠가거니/또 다른 세상일래,인간이 아니로세'했다.

어제는 벚꽃 천지,오늘은 배꽃 세상.어제는 온종일 가랑비에 젖고,오늘은 햇빛 화창이다.

그게 인생이다.

천지의 봄꽃과 새순이 올라와 날로 푸르러지는 앞산을 완상하며 묻혀 사는 이는 누가 왜 사느냐 물으면 그냥 웃는다.

낮에는 흰꽃을 보고 밤에는 두견새 울음에 귀를 기울이며,마음을 옥죄는 자잘한 시름과 번뇌,가난한 살림 사정도 잠시 내려놓는 게 지혜다.

오는 것은 기어코 가고,맺힌 것은 풀어지며,숨은 것들은 드러나는 게 세상 이치다.

마침내 보따리에 싸여 있던 삼성특검이 풀어 헤쳐졌다.

골방에서 서책이나 뒤적이는 나도 귀를 쫑긋 세우고 삼성특검 결과 발표에 귀를 기울였다.

그 결과를 보면서 재벌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둘러싼 현실이 처한 사정과 제도적 장치 사이의 괴리가 엄연한 현실에서 특검의 한계와 고뇌가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본다.

아쉽겠지만 특검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나라 안팎이 뒤집어지는 소동도 이만 그쳤으면 좋겠다.

이번 특검이 기업엔 그동안 관행으로 묵인되어온 위법과 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경종을 울려주었다고 본다.

삼성이 이번 일을 계기로 기업경영을 투명하게 일신하고,글로벌시장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기업일 뿐만 아니라 그 규모와 걸맞은 의젓한 윤리경영에 앞서나가기 바란다.

조선 중기의 대상(大商) 임상옥은 재상평여수(財上平如水) 인중직사형(人中直似衡)이란 말을 남겼다.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는 뜻이다.

누구나 사람에겐 따르고 본받아야 할 법이 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아야 한다.

그게 옛 현자가 이른 법이다.

상인에게는 상인이 따르고 본받아야 할 법이 있다.

상도(商道)다.

한마디로 재물의 성질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재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되새겨야 할 가르침이다.

기업과 그 경영자들이 다시는 피의자의 모습으로 나오는 걸 보고 싶지 않다.

천지를 화사함으로 뒤덮는 꽃철도 한때다.

꽃들은 피어나며 벌써 질 때를 가늠한다.

백로가 나는 물가 벚나무 아래에서 꽃비를 맞으며 술잔을 나누던 벗들은 어느덧 흩어져 몇 해째 소식이 묘연하다.

조지훈은 '낙화'라는 시에서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고 노래한다.

꽃잎이 떨어지는 건 바람의 심술 때문이 아니다.

져야 할 때를 알고 지는 게 꽃의 숙명이니,바람은 꽃이 혼자 떨어지는 수고를 덜어주었을 뿐이다.

피어날 때를 기다려 꽃망울을 터뜨리고 질 때를 가늠해 지는 꽃이니 어찌 그걸 바람 탓으로 돌리랴.바람은 불어야 할 때 불고 잠잠해야 할 때 잠잠하다.

세상 만물은 천지의 시각과 그 본성으로 움직인다.

그게 자연의 순리다.

물과 같이 흐르는 순리는 어디 한 군데 빠뜨리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더라고 했던 시인의 마음에 공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