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패션업체에서 브랜드 기획부터 마케팅까지 총괄하는 브랜드 매니저의 이야기가 흥미로워 소개한다.

"새로 출시한 브랜드가 잘 나가면 사내에서 100~200명쯤은 서로 자기가 했다고 우긴다.

반면 지지부진할 때는 그 많던 사람들이 홍해 갈라지듯 사라지고 황량한 벌판에 단 둘만 남는다.

(브랜드를 책임져야 할) 매니저와 (그의 생사여탈권을 쥔) CEO이다."

신기술이 쏟아지고 시장에서 성패가 극명하게 갈리는 전자ㆍIT(정보기술) 업계는 한 술 더 뜬다.

새 브랜드나 프로젝트 시작 단계에는 다들 발가락 하나씩 걸쳐 놓는다.

실패할 것 같으면 발가락을 바로 떼고,성공하겠다 싶으면 발을 통째로 쑥 들이밀기 위해서다.

이를 '발가락 전략'이라고 부른다.

놀다가 밥 때만 되면 숟가락 들고 덤비는 꼴이다.

권한만 있고 책임은 모호한 관료조직이야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벤처 광풍이 불었을 때,김대중 정부에는 벤처활성화대책을 "내가 만들었다"는 사람만 수십명에 달했다.

이윽고 거품이 꺼지자 다들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이름이 '게이트' 앞에 수식어가 된 사이비 벤처인들과 쪽박 찬 투자자들뿐이었다.

지역 숙원사업이라는 지방공항ㆍ공단ㆍ도로를 건설할 때도 해당 지역 의원,지자체장 할 것 없이 '내 덕'을 자랑했지만,나중에 파리 날릴 때 '내 탓'을 고백한 이는 없었다.

정책실명제가 아직도 지지부진인 걸 보면 '잘 되면 내 탓,못 되면 조상 탓'이란 속담이 하나 틀린 게 없다.

정책실패가 누구 탓인지를 포상자 명단으로 드러낸 아이러니도 있다.

노무현 정부에선 집값이 뛰는 와중에 부동산대책 입안자들에게 무더기로 훈ㆍ포장을 줬다.

최근 총선 당선자들의 뉴타운 공약(空約) 논란은 아무 결정권이 없는 정치인들이 표만 된다면 무엇에든 발가락을 걸친 전형적인 사례다.

애꿎은 유권자들만 헛물을 켰다.

관가의 '얼리 버드(early bird)' 신드롬도 '지식경제부'라는 거창한 간판 달고 농민적 근면성을 지향하는 모양새여서 씁쓸하다.

성과로 말해야지 이른 출근에 목을 맨다면 그것은 또다른 형태의 발가락 얹기가 아닐 수 없다.

물가가 뛰자 정부가 52개 생필품을 특별관리하겠다는 것도 실효성 없는 발가락 얹기로 비쳐진다.

물가가 잡히면 '정부 덕',더 오르면 '국제 원자재 가격 탓'을 할 것인가.

밀가루값을 또 올린다는 데 정부는 어떤 설명을 내놓을지 궁금해진다.

바둑에서 4,5급 기력도 훈수는 9단일 수 있다.

직접 판을 짜진 못하지만 이창호에게도 한 마디 거들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한국에서 잘 안 되는 분야가 네 가지 있다고 한다.

정치ㆍ부동산ㆍ축구ㆍ교육이다.

하나 같이 누구나 너무 잘 알아 해설가 수준이기 때문이다.

왠지 불안한 요즘,국민들이 가장 절실해 하는 것은 발가락 얹기가 아니라 온몸을 던져 무언가를 창조해 낼 사람들 아닐까.

말 잘하는 사람보다 CEO형 대통령을 뽑은 것도 그런 기대와 무관하지 않다.

'여자에게 팔아라'의 저자 마사 발레타는 "발가락만 담그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냐.온몸으로 뛰어들어라"고 CEO들에게 일갈했다.

아무나 비판은 쉬워도 백지상태에 그림을 그려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세상 어떤 나라도 위대한 작가의 동상은 세워주지만 평론가 동상을 세우진 않는다.

오형규 생활경제부장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