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에 샌드위치 현상이 더 심해지고 있다.

지적 인재를 키워서 천재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교육제도 전반을 21세기에 맞게 바꿔야 한다."(2007년 6월 호암상 시상식)

"삼성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5∼6년 뒤에는 큰 혼란을 맞을 것."(2007년 3월 서울 백범기념관)

"중국은 쫓아오고 일본은 앞서가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

(2007년 1월25일 전경련 회장단 회의)

"삼성은 오랫동안 선진 기업을 뒤쫓아 왔지만 지금은 쫓기는 입장에 서 있다.

앞선 자를 뒤따르던 쉬운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두에서 험난한 여정을 걸어야 한다."(2007년 신년사)

"잘 나간다고 자만하지 말고 항상 위기의식을 갖고 변화의 흐름을 잘 파악해야 한다.

과거에 해오던 대로 하거나 남의 것을 베껴서는 절대로 독자성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원점에서 보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창조성이 필요하다."

(2006년 6월 말 계열사 사장단 회의)

"비행기가 음속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비행기의 모든 장치부터 바꿔야 하듯,회사도 일정 수준에서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회사의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

(2006년 3월 계열사 사장단 회의)

"명실공히 월드 프리미엄 제품이 되기 위해서는 디자인,브랜드 등 소프트경쟁력을 강화해 기능과 기술은 물론 감성의 벽까지 모두 넘어서야 한다."

(2005년 4월 밀라노 디자인 회의)


이건희 회장이 삼성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를 던지는 마지막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그룹 총수의 역할을 다하고 22일 물러났다.

1987년 12월1일 고 이병철 회장의 뒤를 이어 46세의 나이에 삼성 총수로 취임한 지 20년4개월여 만이다.

이 회장은 이날 전격적인 퇴진 선언에서 "20년 전 나는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인정받는 날,모든 영광과 결실은 여러분의 것이라고 약속했다"며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 정말 미안하다"면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회장이 이끈 20년은 삼성이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영광의 시기이자 국내적으로는 끊임없는 시기와 견제를 받는 시련의 시간으로 요약된다.

20년 전 취임 당시 14조원이던 그룹 매출액은 2006년 말 152조원으로 11배 가까이 늘었으며 이익은 1900억원에서 14조2000억원으로 75배,주식의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140조원으로 140배나 증가했다.

연간 삼성 계열사의 수출총액은 전체 수출의 20%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룹 계열사의 시가총액도 국내 상장사 전체의 20%를 오르내리면서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왔다.


삼성은 1997년 발생한 외환위기로 수많은 경쟁 기업이 사라지는 와중에도 살을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새로운 성장의 발판을 마련,줄기차게 성장했다.

2007년 현재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169억달러로 세계 21위,포천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존경받는 기업 순위로는 34위를 차지하는 등 명실공히 세계 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회장을 핵으로 한 삼성의 경영은 구조조정본부를 통해 각 계열사의 경영을 총괄하는 시너지효과를 일으키면서 대표적인 경영성공 모델로 자리잡았다.

국내 기업은 물론 일본 등 해외 유수 기업들도 삼성의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하자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삼성이 하면 다르다'는 평판과 함께 삼성은 기업경영의 모범답안으로 자리잡았다.

삼성의 성장과 함께 이 회장 개인의 일거수 일투족에 재계는 물론 사회 전체의 관심도 집중됐다.

그의 경영지침은 삼성을 넘어 재계 전체의 화두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

1993년 '자식과 마누라만 빼고 다 바꾸자'는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삼성을 넘어서 사회 전반적인 혁신을 불러일으키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나부터 변하자'는 슬로건으로 시작된 삼성의 혁신은 양(量) 중심의 기존 경영 관행을 질(質) 중심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최근에는 1명의 천재가 1만명을 먹여살린다는 천재론과 창조경영론 등 어려움에 처한 한국 경제에 돌파의 화두를 제시하고 한국의 발전 모델로 네덜란드와 핀란드 같은 '강소국(强小國)'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회장 개인적으로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국가 이미지 향상에도 적극 기여했다.

하지만 삼성의 이러한 초고속 성장과 대통령과 맞먹는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던 이 회장의 커진 영향력은 역설적으로 '삼성공화국'이라는 비판과 함께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집중적인 견제를 초래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여기에 1996년에는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등 과거의 정경유착 관행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기업 현실도 대통령 선거 직후마다 삼성과 이 회장의 발목을 잡았다.

1996년 신수종 사업을 일으킨다며 야심적으로 시작한 자동차 사업은 4조원이 넘는 부채만 남긴 채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 회장 책임론이 대두됐고,아직도 삼성차 부실문제는 법적인 정리가 끝나지 않았다.

참여연대 등 1990년대 말에 활성화된 좌파 시민단체들도 삼성과 이 회장을 겨냥한 편법상속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삼성을 곤혹스럽게 했다.

2005년 삼성그룹의 정·관계에 대한 로비 의혹을 담은 이른바 'X파일' 사건까지 터졌으나 검찰의 수사 방향이 X파일의 사실 규명보다는 '불법 도청'으로 선회하면서 찻잔속의 태풍으로 끝났다.

그러나 법조팀 강화를 위해 영입한 김용철 변호사가 지난해 거액의 비자금과 정.관계를 향한 무차별 로비,경영권 승계 의혹을 일거에 폭로하면서 이 회장은 취임 후 최악의 위기에 몰렸다.



이로 인해 삼성은 지난해 12월 이 회장 취임 20주년 기념행사도 치르지 못하고 올해 사장단 및 임원 인사도 동결하는 등 6개월여 동안 사실상 경영공백 상황이라는 최악의 사태에 직면하게 됐다.

재계는 이 회장의 이날 퇴진 발표가 삼성 비자금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뜻과 함께 삼성의 경영을 조속히 정상화시키기 위한 경영자로서의 판단도 깔려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회장도 이날 "앞으로 더 아끼고 도와주셔서 삼성을 세계 일류 기업으로 키워주시기 바랍니다"라는 호소로 마지막 퇴진 선언문 낭독을 마무리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 회장이 외견상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됐지만 그동안 삼성을 이끌면서 보여준 뛰어난 리더십과 눈부신 경영업적은 제대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