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2일 국민에게 직접 사과하고 회장직에서 전격 퇴진하겠다고 발표하자 삼성 내부는 충격과 당혹감에 온종일 휩싸였다.

회견장에 배석한 이기태 삼성전자 부회장,최지성 삼성전자 사장,허태학 삼성석유화학 사장,이수창 삼성생명 사장 등 40여명의 계열사 사장단은 굳은 표정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 큰 숨을 몰아쉬는 등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희 회장의 전격적인 퇴진 선언과 전략기획실 폐지 등 10개 항의 경영 쇄신안 발표 이후 삼성그룹에 불어닥친 격변의 포인트는 크게 보면 세 가지다.

이 회장이 없는 삼성의 경영구도와 지배구조는 어떻게 바뀔지,이 회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의 역할과 경영권 승계는 어떤 형태로 어느 시기에 이뤄질 수 있을지,계열사 독립경영은 과연 안착할 수 있을지다.

이학수 부회장은 이날 이 회장 퇴진과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온 전략기획실의 해체에 따라 각 계열사의 독립경영이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 공백 상황을 얼마나 조기에 수습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포스트 이회장,새 경영구도는

삼성은 지난 20여년간 이 회장을 중심으로 전략기획실과 각 계열사 사장단으로 이어지는 '삼각 편대경영'으로 운영돼왔다.

신속한 의사결정과 자원의 선택 및 집중을 강점으로 하는 삼성식 경영은 글로벌 경쟁업체들도 두려워했다.

이 회장 퇴진과 4ㆍ22 경영쇄신 이후 삼성식 경영은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엄청난 과제에도 불구하고 근본적 변화는 물론 일종의 실험까지 불가피해졌다.

이 회장이 퇴진 입장을 직접 밝히면서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도 많아 아쉬움이 크다"고 말한 대목이 이를 보여준다.

경영의사 결정의 중심에 서 있던 이 회장과 잔무를 처리한 이후로 유예시한을 뒀으나 이학수 부회장이 한꺼번에 물러나는 점은 삼성의 경영 전반에 단기적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전략기획실 해체 이후 대안도 아직 불투명하다.

다만,사장단 회의를 실무 지원하고 삼성의 대외창구와 대변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행정서비스실을 신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행정지원실은 기존 100여명의 인력을 갖추고 인사 재무 기획 홍보업무를 모두 관장해온 전략기획실과는 달리 최소 조직이 될 전망이다.

◆이재용 전무의 새 역할 뭘까

이날 삼성은 이재용 전무(사진)로의 승계 문제에 대해 "아무 것도 결정된 게 없다"고 못박았다.

이 전무가 삼성전자 최고고객책임자(CCO)를 그만두기로 했을 뿐,구체적인 새 역할은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룹 안팎에서는 이 회장 퇴진이 현실화된 만큼 승계 방식과 시기 문제 등에 대해 중장기적인 검토가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쇄신안은 이 전무가 CCO를 사임한 뒤 주로 여건이 열악한 해외 사업장에서 임직원들과 함께 현장을 체험하고 시장개척 업무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학수 부회장은 이 전무의 역할과 승계문제에 대해 "5월 중 삼성전자 인사에서 직책과 일이 정해질 것"이라며 "이 회장은 주주 임직원 사회로부터 경영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승계받을 경우 삼성과 본인에게도 불행한 일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이 전무는 이 회장 퇴진 이후 해외 사업장에 머물며 국내 경영과는 거리를 둘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삼성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인 3세 승계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을 극복하기 위해 '백의종군'의 자세로 능력을 입증한 뒤 평가받는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독립경영,집단 경영체제 안착할까

이학수 부회장은 "포스코 등 전문 경영진과 마찬가지로 삼성 각사 CEO도 전문경영인"이라며 경영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계열사 간 중복 투자나 신규 사업 등은 전자 계열사의 경우,사장단이 모여 논의하면 될 것이라는 언급도 했다.

전자,금융,화학 등을 중심으로 삼성이 소그룹 체제로 바뀔 수 있음을 시사한 셈이다.

그러나 경제계에서는 "삼성이 소니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장세진 고려대 경영대 교수는 최근 발간한 '삼성과 소니'라는 책에서 "소니는 창업자에서 전문경영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했고 중앙 조정기능이 약화되고,각 사업부가 각개약진하는 양상이 나타나 투자 타이밍도 잃어버리게 됐다"고 지적했다.

유근석 기자 y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