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주 < 서강대 명예교수·경제학 >

서부활극에서 주인공은 숨어서 총질하지 않지만 무법자는 저격을 서슴지 않는 게 불문율처럼 되어있어 주인공이 그야말로 히어로이다.

'에너미 엣 더 게이트'(2001년 작)는 스탈린그라드에서 1942년 초겨울 60여일 동안 독일군 장교들만 골라 쓰러뜨리며 신출귀몰하는 소련 병사 바실리 자이체프의 놀라운 활약을 박진감있게 그려낸 영화다.

대문 앞까지 바짝 침공해온 적군과 방어군 사이에 저격수들의 두뇌 싸움이 청중의 뇌리에 오래 남는다.

실존 인물 자이체프는 소련의 영웅 반열에 들었고 그의 소총은 현재 스탈린그라드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지난 22일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대표직에서 사퇴하고 전략기획실을 해체하는 경영쇄신안을 발표했다.

그룹 안방에서 일하던 인물이 저격수로 돌변한 결과다.

특검 수사종결에 이은 삼성측의 대책안 발표 이후 경영공백과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는 재계측 합창과 불만을 토론하는 고발인측 외침이 엇갈려 불협화 소음으로 들린다.

입 없는 대다수 국민은 씁쓰레하다.

그것은 국제적으로 한국의 경제규모가 2005년 세계 11위에서 러시아와 인도에 추월당해 13위로 떨어졌다는 보도 때문만이 아니다.

21일 FT가 선정한 100대 글로벌 브랜드에 오른 유일한 한국 기업 삼성의 브랜드 가치가 전년보다 14위나 낮은 58위로 추락했다는 기사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에너지가격 인상과 인적자원 대국,외국 신문의 자의성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국내 고질병 때문이다.

국민이 정말 식상(食傷)한 것은 이번 사건에 승자도 없고 영웅도 없이 오직 모두 패자이고,안티 히어로의 히어로 행세 때문이다.

고도성장기의 폐습을 버리지 못하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어 지배구조를 고치지 못한 삼성의 과오가 적지않다.

정·관계 로비대상 리스트가 여태까지 까발려진 게 전부라면,당시 정권 실세들이 모두 빠져 '앙꼬 빠진 찐빵' 로비인 셈인데,왜 그토록 거액이 소요되었나? 저격수의 필수요건이 밝은 눈이듯,고발자는 높은 도덕성과 깨끗한 마음이 있어야 제구실을 한다.

자신의 소득과 지출 명세가 불분명해서는 곤란하다.

많은 악성 댓글을 그대로 믿을 것 없지만 그래도 의문이 남는 것은 아직 미공개된 리스트 잔여 부분과 찔끔 공개의 속내가 무엇인가이다.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와 경영방식의 업그레이드를 바라는 것은 국민 일반의 요청이다.

아마도 기업인들도 과거 폐습의 질곡에서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폐습의 타성이 계속 위력을 발휘하는데는 국내외 시장 현실과 법적 규제 사이의 괴리 탓이 크다.

조폭이 거리 상인에게 보호세 뜯듯이 권력이 기업에 손내미는 관행이 이제 근절될 것인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기업,정부,국회 모두 환골탈태하는 퀀텀 점프를 보여야 한다.

정·관계 비리의 뿌리는 정치 만능행태와 관료 우월주의에 있다.

저격수들은 자신을 은폐하고 목표를 골라 때를 기다린다.

한국경제가 세계순위 10위권 내에 들었던 한때의 기적은 경쟁국들이 정치경제 혼미속에 죽을 쑤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시 그런 기회가 올 공산은 낮다.

오일·곡물·원자재 가격 폭등,지식재산권 분쟁,신흥개도국의 비약 등 장거리 대포들이 나라 밖에서 한반도를 겨냥하고 있다.

노사분규,정부규제,법질서 부재 등 산탄총으로 무장한 저격수들이 곳곳에 배치해 있다.

가장 두려운 것은 간단한 소화기로 무장한 잠재적 내부 고발자들이다.

내국인끼리 승자 없는 소모전을 끌고 갈 겨를이 없다.

한국경제호(號)의 추락방지는 기업이 항시 국내외 저격수 총부리를 의식하는 데서 비롯된다.

낡은 관행들을 물리치고 새로운 기업경영을 열어가는 진정한 시대의 영웅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