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용 대형 축전지 시장이 확 뒤집힐 겁니다."

2001년 설립된 축전지 전문 벤처기업인 에너그린.직원 60명에 매출은 갓 100억원을 넘어 외견상 전형적인 중소기업이지만 업계에선 '경계대상 1호'로 떠오른 지 오래다.

2002년 환경오염 물질을 쓰지 않고 폭발 위험성을 '0'로 낮춘 포켓형 대용량(10암페어 이상) 니켈금속수소(NI-MH) 축전지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데 이어 최근 가격대를 납축전지 수준으로 대폭 낮춘 초저가 친환경 'GB축전지'를 상용화하는 등 높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서다.

대용량 축전지는 정전에 대비해야 하는 석유화학공장이나 제철소,지하철 등에서 비상 전원으로 쓰이는 필수 에너지 저장 장치.특히 최근 카드뮴과 납 등을 쓰지 않는 친환경 축전지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기술 개발 경쟁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승부의 관건은 가격.박동필 에너그린 대표는 "GB축전지는 친환경 축전지의 고질적 단점이었던 높은 가격을 3분의 1 수준으로 끌어내려 산업용 축전지 시장의 85%가량을 장악한 납축전지를 충분히 대체할 수 있게 만든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무게와 크기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는데도 출력은 납축전지보다 2배가량 높아지는 등 품질이 훨씬 좋아졌다고 박 대표는 덧붙였다.

기술적 돌파구는 발상의 전환에서 찾았다.

박 대표는 "핵심 부품인 극판 구조와 극판을 감싼 활성물질을 기존 개념과는 다르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축전지 강국인 일본도 안전성을 갖춘 10암페어급 이상 산업용 니켈금속수소 축전지는 아직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직원 3명으로 출발했던 에너그린의 성장 과정은 결코 순탄치 못했다.

무엇보다 자금과 판로가 문제였다.

'기술력'만 믿고 뛰어들다 보니 '장기전'에 대비할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시장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친환경 제품이라지만 기업들 입장에선 굳이 값비싼 니켈금속수소 축전지를 살 이유가 없었던 까닭이다.

이로인해 창업 첫해 2억여원의 적자를 냈다.

박 대표는 마지막 자산인 아파트를 담보로 2억8000만원을 마련했지만 시제품 재료비로 곧 바닥이 났다.

하루에도 몇 차례나 '극단적'인 생각을 했다.

이 때 손을 내민 곳이 기술보증기금.박 대표는 "다른 금융기관에 신청한 자금 지원 요청이 모두 거절돼 자포자기한 상태였다"며 "애초 3억원을 신청했는데 보증금액이 되레 5억원으로 늘어나 깜짝 놀랐다"고 회고했다.

당시 기술평가를 담당했던 전주기술평가센터 정문교 박사는 "물론 기술의 잠재 가치도 탁월했지만 밤 새도록 쉬지 않고 기술을 설명하던 열정에 신뢰를 느껴 보증금액을 늘렸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첫 매출계약은 창업 3년차인 2003년에야 비로소 이뤄졌다.

무작정 찾아간 포스코제철소 이원표 소장(2007년 작고)에게 5분만 제품 설명을 들어달라고 통사정한 것이 효과를 발휘했다.

이 전 소장은 후일 그에게 "축전지를 안 사주면 꼭 무슨 일을 저지를 것처럼 눈빛이 절실했다"고 털어놨다고 박 대표는 전했다.

기보는 이후에도 고비 때마다 응원군이 됐다.

2002년부터 6년간 18억2000만원의 기술평가보증을 지원해 줬던 기보는 지난해 에너그린 지분의 4.95%(5억원)를 사들이기까지 했다.

그동안 에너그린은 2003년 신기술(NT) 마크에 이어 2007년 신제품(NEP) 인증까지 따내는 등 차곡차곡 성장 기반을 마련했다.

매출액도 30억원(2004년),44억원(2005년),59억원(2006년),101억원(2007년)으로 해마다 크게 늘어났다.

그는 조만간 서울산업대에서 축전지 연구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학원 원장으로 근무하던 그는 통역이 계기가 돼 축전지와 인연을 맺었다.

인도 회사와 한국 업체의 협상 통역을 맡았는데 계약이 성사되자 인도 업체에 전격 스카우트된 것."졸지에 아시아 담당 기술영업을 맡았으니 공부를 안 할 수가 없었죠."

이후 그는 밤낮 없이 축전지에 매달렸다.

핵잠수함용 축전지 등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200여종의 축전지를 몽땅 뜯어봤다.

"공부를 할수록 축전지에 빠져들었어요.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 같았죠."

최근에는 중국,인도,터키 등과 300만달러 어치가 넘는 수출계악을 체결하는 등 수출 물꼬까지 터졌다.

그렇지만 박 대표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말한다.

산업용 축전지 시장은 국내만 6000억원,세계시장은 무려 15조원에 이르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친환경 대형 축전지 기술을 일찌감치 공략했던 만큼 물 만난 고기가 된 셈"이라며 "가장 신뢰받을 수 있는 축전지 업체가 되기 위해 기술 개발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