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가 나빠지면 얇은 황(노란색)봉투가 많이 팔려요. 최근 들어 이 황봉투가 5~10% 정도 더 나가기 시작했는데,걱정이 큽니다."

지난달 26일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위전리에 있는 이화산업사 봉투공장.전자동 생산설비를 갖춘 규격봉투 생산룸에 들어서자 갓 찍어낸 새하얀 우편봉투가 떡 시루처럼 차곡차곡 쌓인 선반이 눈에 들어온다.

'봉투시루' 위에는 비닐랩에 감긴 벽돌이 2~3개씩 올려져 있다.

벽돌무게를 이용한 이른바 '숨죽이기' 공정이다.

통통하게 습기를 머금은 봉투를 납작하게 눌러야만 비닐포장이 쉬워지고 감촉도 좋아진다.

벽돌을 들어내고 봉투의 접착상태를 확인하던 최훈 대표(36)는 대뜸 경기 얘기부터 꺼냈다.

그는 "황봉투가 백봉투보다 10%가량 싸고 많이 나가는 만큼 소비자들의 지갑사정도 좋지 않을 것"이라며 "여태껏 봉투 주문으로 본 경기 분석전망이 어긋난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화산업사는 국내 봉투시장의 70%를 점유 중인 최대 봉투전문 회사.영수증 계산서 노트류 등 다른 사무용 문구류도 만들지만, 주력 제품은 전체 매출의 30%를 차지하고 있는 봉투.최 대표는 창업자인 아버지 최동현 회장(64.중국 체류)의 뒤를 이어 지난해부터 회사를 이끌고 있다.

회사는 파주공장에서 편지봉투 엽서봉투 민무늬봉투 등 하루 100만장가량의 봉투를 생산하고 있다.

국군위문편지가 유행하던 1970~80년대와 비교하면 절반으로 줄었지만 연간으로 치면 3억장에 이르는 규모.국민 1인당 매년 5~6장의 이화봉투를 쓰고 있는 셈이다.

"십중팔구 축의금이나 부의금 전달용으로 썼다고 보면 틀림없다.

[代를 잇는 家嶪] (11) 이화산업사‥"위문ㆍ연애편지 담던 '이화봉투' 이메일 시대에도 쓰임새 있죠"
"(최 대표)

시대 변화의 격랑을 뚫고도 편지봉투가 살아남은 비결은 현금과 서류 등을 담을 수 있도록 속이 보이지 않게 진화한 덕분이다.

우편번호를 적는 네모칸이 인쇄된 봉투보다 백지상태인 민무늬 봉투가 두배는 더 잘나가고, 하늘색 속지가 들어간 축의금 전용봉투가 생긴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공문서용 A4지를 넣기 위해 봉투 넓이와 길이도 10%가량 커졌다.

최 대표는 "결혼식이 많은 3~5월이 전체 매출의 40%를 차지하고,주중보다는 주말 매출이 10배는 많다"고 설명했다.

이화산업사가 설립된 것은 1973년.충남 공주에서 700원을 들고 상경한 최 회장이 청계천 인근에 낸 작은 지업사(이화사)가 시초다.

을지로 종이재료 총판점 주인들로부터 '눈칫밥'을 먹어가며 어깨너머로 종이자르기 등을 익힌 뒤 대리점 개설 기회를 잡은 것.최 회장은 때마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대리점 이윤이 사라지자 직접생산에 뛰어들었다.

당시 현대 서라벌 등 10여개 선발 회사들이 버티고 있었지만 빠른 시일 내에 시장을 장악했다.

무엇보다 품질우선주의가 주효했다.

가장 좋은 종이를 쓰겠다는 원칙을 지키는 한편 해외 전시회를 찾아다니며 품질 고급화와 품목 다양화를 시도했던 것.대표적인 제품이 먹지없는 세금계산서다.

윗면에 글씨를 쓰면 아래쪽에 사본이 만들어지는 이 제품은 까만 카본잉크를 바른 기존 세금계산서를 퇴출시킬 정도로 대박이 났다.

신뢰를 지켜야 한다는 최 회장의 철학도 숱한 부도 위기를 넘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최 대표는 "35년간 한번도 대금결제일을 어긴적이 없을 정도로 약속을 지키셨다"며 "납품업자들은 자기네가 부도나도 아버지가 맡긴 물품 보증금은 모두 돌려주는 등 보답을 했다"고 회고했다.

그런 와중에 경쟁사들이 오일쇼크와 외환위기 등으로 문을 닫자 강력한 시장 지배력을 발휘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최 대표는 "물건을 떼가려는 나까마(중간도매상)들이 공장 앞에서 앞선 대기표를 놓고 다투기도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봉투와 사무용 문구류가 뚜렷한 사양길에 접어든 것은 2000년 초부터다.

이메일과 휴대폰이 늘어나면서 편지가 사라지고 사무전산화가 가속화된 탓이다.

매출도 해마다 10~20%씩 떨어졌다.

[代를 잇는 家嶪] (11) 이화산업사‥"위문ㆍ연애편지 담던 '이화봉투' 이메일 시대에도 쓰임새 있죠"
꿋꿋하게 버티던 최 회장이 미국에서 직장을 다니던 최 대표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 잦아진 시점이다.

최 대표는 2004년 귀국하자마자 신설동과 파주시에 있던 생산시설을 통합하는 한편,불합리한 공정을 개선하는 등 회사살리기에 나섰다.

이와 함께 문구업체 2세경영자들의 모임인 '문청회'에 가입,중장기 시장전략을 논의하는 등 앞으로의 살길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2006년부터는 원가 절감을 위해 노트류와 계산서류 일부를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다.

이를 위해 최 회장이 중국에서 홀로 숙식을 해결하며 현지 생산을 총괄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2월에는 스카치 테이프나 풀칠을 하지 않아도 밀봉이 잘 되는 양면테이프 부착 봉투를 개발,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는 "퇴조하는 시장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브랜드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라며 "제품 고급화와 다양한 품목 개발로 경쟁력을 키워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