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한진 < 한림대 교수·사회학 >

최근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오성홍기'사건으로 다문화와 민족주의 논의가 다시 주목을 끌고 있다.

민주화 이후 한국인들이 새로이 경험하는 것 중 하나는 세계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이주자들과의 공존의 경험을 통해,대외적으로는 기아,전쟁,독재를 겪고 있는 저발전국에 대한 관심과 개입을 통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고 있다.

그런데 세계와 인간을 얘기하던 근대 서구의 보편적인 가치가 제국주의의 빌미가 됐던 것처럼 21세기 세계시민으로서의 형제애도 점점 심화되는 민족주의,제국주의 경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은 캐나다,호주 등 일찍이 다문화주의를 채택했던 국가들과 달리 이민족과의 공존의 경험이 일천하고 소수민족 공동체가 형성돼 있지 않는 등 다문화주의의 전제조건이 결여돼 있다.

실제 한국사회는 '다문화'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정작 다문화주의의 핵심인 문화적 차이,이주민들의 문화에 대한 논의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왔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실제론 '다문화' 논의가 넘치고 있다.

다문화 담론이 한국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은 이중적이다.

한편에는 90년대 이후 '압축적 성장'을 보인 문화,타자,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동아시아 차원에서의 한국의 아(亞)제국주의적 지위가 그 배경에 있었다.

동아시아를 무대로 한 새로운 발전 전략과 한류 열풍은 한국의 새로운 위상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주민의 유입은 한국인들이 제국주의 담론의 핵심인 오리엔탈리즘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근대 이후 최초로 다른 민족의 속성을 규정하고 그들 내부에 위계서열을 매기는 권력의 쾌감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배경으로 한국인들이 오리엔탈리즘의 대상에서 주체로의 변신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시민으로서의 태도와 민족주의적 태도의 공존은 최근 성화봉송 사태에 대한 대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번 사태가 갖는 여러 의미 중 하나는 유학생이라는 특수한 신분이기는 하지만 거리에서 이루어진 매우 드문 외국인들의 집단행동이라는 점이다.

이는 1970년대 독일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반독재민주화 시위를 벌였던 일을 떠올리게 한다.

이번 사태가 그 때와 다른 점은 모국의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애국주의적 시위였다는 사실이다.

이 차이는 세계적으로 시민사회가 민주화를 이끌던 1970년대와 시민사회의 보수화로 특징지어지는 2000년대의 차이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한국 시민사회의 대응은 이제 세계에 대한 한국의 대응이 서구의 시각과 국제사회의 표준을 따라가고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이번 사태의 배경이 된 티베트 독립문제에 대한 태도나 중국에 대한 인식은 국제사회의 것과 대동소이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서구의 한계도 그대로 안고 있다.

첫째는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이중잣대의 적용이다.

티베트는 사실 북한만큼이나 보수적이고 이란보다도 더 정교(政敎) 일치적인 사회이지만 그 평가는 북한이나 이란에 비해 훨씬 관대하다는 점을 읽을 수 있다.

둘째는 중국과 서구 제국주의 세력간 경쟁의 측면이다.

1,2차대전이나 파시즘 등 20세기 비극의 본질이 선발 제국주의와 후발 제국주의 사이의 투쟁이었다는 점과 마찬가지로 중화민족주의에 대한 우리 일부 보수단체들의 민족주의적 대응 역시 위험성을 안고 있다.

한국사회가 나아갈 방향은 이러한 서구 제국주의적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 땅에 들어와 있는 타자들에 대한 지나친 우리 중심적 시각을 넘어서는 것이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