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문명의 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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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래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
지난 12일 중국 쓰촨성에서 일어난 강도 8.0의 지진은 올림픽을 앞둔 중국을 깊은 슬픔에 몰아넣고 있다.
이미 수만명이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다.
1976년 중국 탕산 지진과 2004년 동남아 일대의 쓰나미는 각기 25만명 이상의 인명을 앗아갔다는데,그보다는 적은 피해라 하여 위로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은 지진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편이라지만,앞일을 알기는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리 큰 지진은 없었던 것 같다.
근래 홍성,영월,포항 등지에서 진도 5 전후의 지진이 있었고,1978년 홍성 지진은 3억원 이상의 피해액을 낸 것으로 기억된다.
최근 30년 동안 한국에는 모두 678차례 지진이 있었다지만,1905년 인천에 근대적 지진계가 설치된 이후 강도 5.0 이상의 지진은 6차례 정도라니 그리 심한 편은 아니다.
삼국시대 이래의 역사를 보아도 지진이 우리나라에서 큰 피해를 준 일은 없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는 각각 97회와 84회의 지진 기록이 보인다.
조선시대로 들어오면 1392년 조선왕조 개창 이후 1527년까지 490회의 지진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이 통계는 30여년 전 내가 사료를 한 줄씩 읽어 조사한 결과인데,지금은 전산화된 사료 덕택에 누구나 쉽게 지진 기록을 들여다 볼 수도 있다.
이 많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지진이 실질적 피해를 끼쳤다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지진을 사람의 잘못으로 해석하던 모습이 여기저기 감춰져 있어 흥미롭다.
예를 들면 신라의 지진은 임금의 죽음을 예고하는 조짐으로 기록된다.
혜공왕 15년(779년) 봄 경주에서 일어난 지진은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는데,바로 이듬해 왕과 왕비는 살해당한다.
또 870년과 875년(경문왕 15년)의 지진은 왕비와 왕의 죽음을 예고한 듯이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지진을 왕의 죽음과 연계한 경우는 없다.
오히려 신하가 신하답지 못해(臣不臣ㆍ1184년),또는 명령이 신하에게서 나와(號令從臣出:1196년) 지진이 일어난다는 해석이 몇 차례 보인다.
둘 다 이의민과 최충헌이 권력을 휘두르던 무신정권 시대의 반응이다.
조선시대로 들어가면 지진은 주로 임금의 정치 잘못으로 해석된다.
1493년(성종 24) 영의정은 지진의 책임을 지겠다며 사직했고,1498년(연산군 4)에는 도승지가 물러갔다.
1513년(중종 8)에는 좌의정이,1515년(중종 10)과 1542년(중종 37)에는 3정승이 함께 사직했다.
이 모든 경우 임금은 자신이 책임자라며 정승들을 만류했다.
하지만 연산군 말기에는 임금의 태도가 정반대로 나타나기도 한다.
1503년(연산군 9) 전국 여기저기서 지진 보고가 있자,연산은 그것은 음(陰)이 성하고 양(陽)이 위축돼 일어난다며,신하들이 너무 날뛰어 임금이 위축된 것이라고 되받아쳤다.
지진 홍수 가뭄 태풍 등 지구상의 자연 재해는 해마다 급격히 증가하는 듯하다.
인터넷 등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그 피해가 극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지진을 비롯한 자연 재해는 결국 "인간의 하는 짓에 대한 자연의 반응"이라는 옛 사람들의 판단에 여전히 귀기울일 가치가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일어난 인구 폭발과 도시화가 더욱 대규모 재해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재해가 더욱 무서워지는 것은 바로 문명의 업보라는 말이다.
인간의 자연 파괴가 더해갈수록 자연 재해 역시 대규모화한다.
그것은 인간의 위협에 대한 자연의 역습이기도 하다.
이런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보다 안전한 문명'을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고,그것만이 인류를 구원의 길로 안내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2일 중국 쓰촨성에서 일어난 강도 8.0의 지진은 올림픽을 앞둔 중국을 깊은 슬픔에 몰아넣고 있다.
이미 수만명이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다.
1976년 중국 탕산 지진과 2004년 동남아 일대의 쓰나미는 각기 25만명 이상의 인명을 앗아갔다는데,그보다는 적은 피해라 하여 위로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은 지진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편이라지만,앞일을 알기는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리 큰 지진은 없었던 것 같다.
근래 홍성,영월,포항 등지에서 진도 5 전후의 지진이 있었고,1978년 홍성 지진은 3억원 이상의 피해액을 낸 것으로 기억된다.
최근 30년 동안 한국에는 모두 678차례 지진이 있었다지만,1905년 인천에 근대적 지진계가 설치된 이후 강도 5.0 이상의 지진은 6차례 정도라니 그리 심한 편은 아니다.
삼국시대 이래의 역사를 보아도 지진이 우리나라에서 큰 피해를 준 일은 없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는 각각 97회와 84회의 지진 기록이 보인다.
조선시대로 들어오면 1392년 조선왕조 개창 이후 1527년까지 490회의 지진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이 통계는 30여년 전 내가 사료를 한 줄씩 읽어 조사한 결과인데,지금은 전산화된 사료 덕택에 누구나 쉽게 지진 기록을 들여다 볼 수도 있다.
이 많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지진이 실질적 피해를 끼쳤다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지진을 사람의 잘못으로 해석하던 모습이 여기저기 감춰져 있어 흥미롭다.
예를 들면 신라의 지진은 임금의 죽음을 예고하는 조짐으로 기록된다.
혜공왕 15년(779년) 봄 경주에서 일어난 지진은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는데,바로 이듬해 왕과 왕비는 살해당한다.
또 870년과 875년(경문왕 15년)의 지진은 왕비와 왕의 죽음을 예고한 듯이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지진을 왕의 죽음과 연계한 경우는 없다.
오히려 신하가 신하답지 못해(臣不臣ㆍ1184년),또는 명령이 신하에게서 나와(號令從臣出:1196년) 지진이 일어난다는 해석이 몇 차례 보인다.
둘 다 이의민과 최충헌이 권력을 휘두르던 무신정권 시대의 반응이다.
조선시대로 들어가면 지진은 주로 임금의 정치 잘못으로 해석된다.
1493년(성종 24) 영의정은 지진의 책임을 지겠다며 사직했고,1498년(연산군 4)에는 도승지가 물러갔다.
1513년(중종 8)에는 좌의정이,1515년(중종 10)과 1542년(중종 37)에는 3정승이 함께 사직했다.
이 모든 경우 임금은 자신이 책임자라며 정승들을 만류했다.
하지만 연산군 말기에는 임금의 태도가 정반대로 나타나기도 한다.
1503년(연산군 9) 전국 여기저기서 지진 보고가 있자,연산은 그것은 음(陰)이 성하고 양(陽)이 위축돼 일어난다며,신하들이 너무 날뛰어 임금이 위축된 것이라고 되받아쳤다.
지진 홍수 가뭄 태풍 등 지구상의 자연 재해는 해마다 급격히 증가하는 듯하다.
인터넷 등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그 피해가 극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지진을 비롯한 자연 재해는 결국 "인간의 하는 짓에 대한 자연의 반응"이라는 옛 사람들의 판단에 여전히 귀기울일 가치가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일어난 인구 폭발과 도시화가 더욱 대규모 재해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재해가 더욱 무서워지는 것은 바로 문명의 업보라는 말이다.
인간의 자연 파괴가 더해갈수록 자연 재해 역시 대규모화한다.
그것은 인간의 위협에 대한 자연의 역습이기도 하다.
이런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보다 안전한 문명'을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고,그것만이 인류를 구원의 길로 안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