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규 < 고려대 의대 교수·내과 >

아주 오래된 경제학 논란 중에 성장과 분배에 관한 것이 있다.

성장을 통해 분배를 이루자는 쪽을 성장론자라고 부르고,분배를 통해 성장을 달성하자는 쪽은 분배론자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성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념적으로 우익쪽으로 분류되고 자본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자로 불리며,분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좌익으로,그리고 평등을 중요시하는 사회주의자로 불린다.

성장론의 문제점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심화와 과다한 경쟁이 지적되고 분배론의 문제점은 동기부여가 없어 사회 전체가 성장동력을 잃고 하향평준화가 되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최근 건강보험 재정 부실에 따른 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제약업계를 둘러싼 공공재 논란이 다시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갈등의 핵심은 약효 및 경제성을 평가해 약값을 인위적으로 낮추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

의약산업을 공공재로 볼 것이냐 산업으로 볼 것이냐의 논란 역시 성장과 분배의 논란과 동일선상에 있다.

의약산업에서 공공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성장에 제동이 걸리고 의료와 약품의 질이 떨어지게 된다.

반면에 산업으로서의 측면을 강조하면 의료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소외계층이 늘어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미국과 유럽의 실태를 살펴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미국은 자본주의의 종주국답게 의약산업을 공공재로 보기보다는 산업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유럽은 공공성을 강조해 국가의 강력한 통제하에 두고 있다.

그 결과로 미국의 의료수준과 제약수준은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게 됐으나,95%가 공공의료 서비스인 유럽의 의료와 제약산업은 옛날의 영광을 잃은 채 자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성장과 분배에 관한 논란에서 정답은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이다.

문제는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모든 나라나 단체,조직의 꿈이자 이상이지만 그야말로 달성할 수 없는 환상일 뿐이라는 점이다.

역사상 어느 나라나 조직도 성장을 통해 분배를 달성한 일은 있어도 분배를 통해 지속적인 성장을 이룩한 나라는 드물며 더군다나 실제로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이룩한 나라나 조직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정부가 요즘 추진하고 있는 약가 인하정책과 의료비에서 약제비를 축소시키려는 노력은 결국 약값이 국민건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정부의 통제가 필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정부 관점이 의약에 관한한 산업이라기보다는 공공재라는 관점에 서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공공재는 외교,국방,경찰력과 같은 절대적인 공공재와 의료,교육,식량과 같은 상대적인 공공재가 있다.

그런데 같은 상대적 공공재이면서도 그동안 교육이나 식량 등에는 정부가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으면서 유독 의약에 관해서만은 별다른 지원이 없었다.

식량안보를 위해 농촌에 들어간 돈만 수백조원에 이르고 전국의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그동안 정부가 지원한 예산이 수백조원에 달하지만 의료계와 약업계에 수백조는커녕 수조원을 지원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처럼 자원도 없고 자본도 빈약하며 내수시장이 좁은 나라가 첨단기술 및 거대자본으로 무장한 일본과 싼 인건비 및 방대한 내수시장을 갖춘 중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시간과 폭은 그리 넉넉지 못하다.

국가경쟁력 강화가 절체절명의 과제인 이 시대에 산업화를 지향하면서도 공공의료 체계를 강화하는 실태는 사뭇 모순적이다.

이제는 국가의 생존을 위해 무엇을 산업으로 선택하고 그래서 무엇을 감수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