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 스토리'엔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란 대사가 나온다.

옛날 영화 얘기를 들먹일 것 없이 연애해본 사람은 안다.

상대가 굳은 얼굴로 내뱉는 "미안하다"의 뜻이 뭔지.싸움 끝에 나온 "헤어지자"는 다음날이면 없던 일이 될 수 있지만 "미안하다"는 그렇지 않다.

직장에서 인사에 관한 방(榜)이 나붙기 직전 윗사람이 "미안하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승진에서 배제됐거나 원하지 않는 부서로 전보되는 등 실망스럽고 서운한 지경에 처하게 됐다는 의미다.

어느 쪽이든 사태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통보가 포함돼 있다.

울고불고 해봤자 소용없다는 얘기다.

결국 빈말이나 다름없다는 건데 보통 사람들은 그 빈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란다.

다짜고짜 연락을 끊지 않고 만나서 고개를 떨구면,당연히 제 차례라 여겼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줬어도 "미안하게 됐다" 한마디만 들으면 "사정이 있겠지" "이것저것 살피려니 어쩔 수 없었겠지" 이해하려 든다.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인 맨유 대 첼시 경기에 박지성을 선발하지 않은 맨유의 퍼거슨 감독이 경기 전 박 선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는 소식이다.

경기는 끝났고 그를 뽑지 않은 뚜렷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은 채 '막판 전술 변화 탓이었던 듯'이라는 식의 해석만 분분하다.

퍼거슨 감독의 속뜻은 알 길 없다.

그토록 간절했던 기대가 무너졌음에도 '미안하다'고 했다는 말에 되도록 좋은 쪽으로 생각,위로받으려 하는 것이다.

살다 보면 이런 일은 수없이 많다.

둘러대는 말인줄 뻔히 알지만 불평하고 따져봤자 속만 상할 뿐 뾰족한 수가 없으니 훗날을 기약하며 넘어간다.

의견이나 이해관계가 달라 싸우다가도 "미안하다" 사과하면 받아들이려 애쓴다.

마음 속 응어리까지 풀리지 않아도 계속 다툼으로서 생겨나는 문제나 주위의 불편을 감안,화해 내지 타협한다.

단 그러자면 "미안하다"에 진정성이 느껴져야 한다.

더 중요한 건 미안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고.정치나 행정도 다르지 않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