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과 < 금융정보분석원장 >

'자금세탁(Money Laundering)'이라는 말은 원래 1920년대 미국에서 알카포네와 같은 조직범죄자들이 도박이나 불법 주류판매 등을 통해 모은 수익금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있고 현금거래가 빈번한 세탁소(Laundry)의 합법적 수익으로 가장한 데서 유래했다.

이러한 자금세탁 방지를 위해 설치된 기구가 금융정보분석원이다.

우리나라는 2001년에 설치됐으며,현재 100개가 훨씬 넘는 나라가 이 조직을 갖고 있다.

세계 금융정보분석기구 연차회의인 제16차 '에그몽 그룹'총회가 26일 아시아 지역에서는 최초로 서울에서 개막된다.

세계 106개 회원국 대표들이 참여해 자금세탁방지와 테러자금조달 차단을 위한 각종 정책을 논의한다.

금융은 기본적으로 상호 신뢰와 신용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산업이며,자금세탁방지 제도는 금융거래의 신뢰 구축을 위한 기본적인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즉 신뢰와 투명성은 금융산업 선진화의 기본 요체인 것이다.

이러한 투명성과 정반대되는 사례로 리히텐슈타인이라는 나라를 들 수 있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위치한,인구 3만5000명,서울 크기의 4분의 1 정도 면적의 초미니 입헌공화국인 이 나라는 금융이 국내 총생산의 30%를 차지하는 금융산업 국가다.

1926년부터 조세피난처를 운영해 세금을 피하려는 유럽 부호들의 비밀금고 역할을 해 왔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2000년 리히텐슈타인을 포함한 35개국을 비협조적 조세피난처로 블랙리스트에 올린 이후 2008년 현재까지 32개국이 백기를 들었으나,리히텐슈타인은 모나코,안도라와 함께 아직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러한 비밀 보호 전통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독일 정부가 자국 부유층의 탈세 혐의를 조사하면서 리히텐슈타인 주요 은행들의 조세포탈 방조혐의 수사에 착수하면서부터다.

리히텐슈타인의 통치자 알로이즈 왕자도 결국 국제적인 압력과 고립화를 우려해 한 발 물러섰다.

"법과 제도를 국제기준에 맞게 개정하고,자국 은행에 대한 관리 감시를 강화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선 것이다.

과거에는 금융거래의 비밀을 지켜주고 익명성을 보장해 주며,각종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것이 부호들의 자금을 유치하고 금융산업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합리적인 정책수단으로 인식됐다.

낮은 세율과 비밀보호를 미끼로 유럽 부호들을 유인한 조세피난처들은 심지어 나치 전범의 금과 돈까지도 관리해 주며 막대한 수수료를 챙겼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들어 미국,EU 등 선진국들이 '범죄자금 추적과 탈세범 처벌'을 기치로 조세피난처에 정보공개를 요구하면서 상황은 변화하고 있다.

과거 '고객 비밀 보호의 보루'라는 명성을 갖고 있던 국가들이 이러한 정책을 포기하고 있다.

이제는 범죄자금의 비밀을 보장해 주고 익명성을 지키는 방식으로 금융회사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은 없으며,국제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정책수단으로 제재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추세를 반영해 1990년대 이후에는 깨끗하고 투명한 금융시장이 투자자로부터 오히려 신뢰를 받고,금융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뉴욕,런던,싱가포르,홍콩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제 선진 금융시장은 엄격한 기준 아래 투명한 금융거래를 보장함으로써 역내 금융회사나 기업이 국제적 책임을 다하는 회사라는 평판을 얻도록 함으로써 더욱 많은 투자자를 유치하고 있다.

이러한 금융산업 발전의 패러다임 변화는 금융을 신성장 동력 산업으로 육성하고 동북아 금융 중심지를 추구하고 있는 우리나라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제 자금세탁방지와 테러자금조달 차단,더 나아가 금융거래의 투명성과 금융시스템의 신뢰 제고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사항이 되고 있다.

이번 '에그몽 그룹'총회가 우리 금융산업 선진화의 전제조건으로서의 '투명성'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