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꽃의 계절이라고 한다. 꽃이 피니 지난겨울 동안 보이지 않던 벌레와 곤충들도 모여든다. 봄엔 꽃들만의 천국은 아닌 듯싶다. 꽃들과 더불어 온갖 사물들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천혜의 자연을 가지고 있던 봄꽃뿐만 아니라 여름 꽃도 가을꽃도 느끼고 즐길 수 있다. 더구나 냉랭한 겨울에 설산에서 맞보는 겨울 꽃도 있는 법이다.

물론 봄의 꽃이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다. 그것은 긴긴 겨울을 보내고 난 이후에 핀 꽃들이라서 더 그럴 것이다. 겨울 내내 춥고 힘든 마음이 아름다운 꽃들에 눈길을 줄때 그 꽃은 더 아름답고 더 향기롭고 더 고귀하기 마련이다. 인간의 마음이 곧 꽃의 마음일 게다.

우리는 겨울에도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집에서 키우는 정원의 꽃이 아니라 대자연 속의 꽃이다. 그것이 바로 설화(雪花) 아닌가. 나무는 화려한 봄 여름을 보내고 겨울이 오면 나목으로 세상을 버티며 한 시절을 보내는 것이다. 빈 몸, 그 자리에 눈이 내려 온 가지와 나무를 덮어 만든 설화는 자연의 백미가 아닐까?

그렇듯 자연은 오묘하다. 순백의 겨울꽃(설화)에서는 인내를 배우지만, 봄의 꽃에서는 사랑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봄꽃은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보낼 수 있지만, 설화는 보낼 수가 없다. 배달되기 전에 다 녹아 버릴 테니까. 설화는 함께 자연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감상할 수도 없다.

요즘 지인들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봄 마다 향기를 뿜어주던 아카시아 꽃에서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뭔 조화속인지 모르겠단다. 물론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예전 같은 향기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전자파의 유해성은 생각보다 큰 듯하다. 곤충에게 매우 치명적인 전자파가 공간에 빽빽하게 거미줄 치고 있다. 곤충들이 배겨내기 힘들다. 게다가 지구온난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경종을 울려왔다. 혹시 지구온실화가 우리에게 까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온실 속 꽃들은 향기가 없거나 적다. 그것은 벌과 나비가 없기 때문이다. 향기는 벌들과 나비 같은 곤충들이 함께 존재할 때 생산되는 것은 아닐까.

우주 만물의 이치는 하나가 전부인 것 같지만 그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요소들이 공존한다. 물 한 방울도 더 작은 물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꽃 한 송이도 다른 요소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 한 방울도 하나의 우주법계이며 꽃 한 송이 역시 하나의 법계인 것이다. 존재의 질서인 것이다. 물 한 방울을 쉽게 버리고 꽃 한 송이를 가벼이 꺾으면 법계를 버리고 꺾는다는 말이 있다.

3천 년 전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저잣거리에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승상에게 보고하였으나 승상은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것은 관할 관청에서나 할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잣거리에 큰 소 한 마리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승상은 놀라서 자세히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심상치 않은 일들을 예고하는 자연의 경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상에는 알 수 없는 변화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저잣거리의 살인사건보다 큰 소가 나타난 것은 지상의 변동을 암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자연의 변화같은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는데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곤충과 벌레 짐승들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자연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자연이 곧 집이다.

올해 유난히 대규모 자연 재해가 많다. 미얀마 싸이클론으로 10만 명 이상, 중국의 대지진으로 수만 명이 몰살당했다. 올봄 아카시아 나무에서 예전 같은 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지인들의 말을 들으며 대자연의 섭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지구에 큰 변화가 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주 법계에 알 수 없는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집 정원을 아무리 잘 가꾸어도 동네 주유소가 폭발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농사가 잘 되도 나라에 전쟁이 터지면 풍년이 아니다. 통장에 돈이 늘고 아파트 평수가 늘어 간다 해도 거대한 자연의 변화가 들이닥치면 꼼짝없다.

최근 몇 년간 강원도의 산불, 홍수 재해는 백두대간을 무분별하게 훼손한 인간의 탐욕에 대한 경고였다. 우리 인간 역시 곤충과 벌레 짐승들과 같이 대자연이라는 집에 함께 살고 있다. 가끔 애정 어린 손길로 대자연이라는 우리 큰 집을 돌보는데 시간을 내봄직하다. 세상은 자기 생각한 것만큼의 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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