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임효씨(53)의 눈에 비친 세상은 비우고 다시 채워간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노송 아래 정자에 가부좌를 튼 선승,큰 붓으로 툭툭 건드리면 사라지는 단조로운 시간의 흔적….

임씨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전통 발효음식에서 맛을 내는 과정과 비슷하다.

수제 한지작업 자체가 깊은 장맛처럼 저마다의 빛깔과 향기로 '발효'하고 있고, 어지러울 정도로 피어 있는 꽃들은 볼수록 생각에 빠져들게 한다.

"안동에서 구해 온 닥나무 껍질을 잿물에 삶아 종이 죽을 만든 후 세 차례에 걸친 도침(두드림)을 통해 한지를 만들어요.

한지에 수묵으로 드로잉을 하고, 그 위에 돌가루(석채)로 색을 우려냅니다.

종이에 색이 발효되는 셈이지요.

발효음식이 미묘하고 특유한 맛을 내듯, 한지에 발효된 채색화는 옷칠의 과정을 거치면 맛 깊은 형상으로 완성됩니다.

작품이 태어나기까지는 18~24개월 정도가 걸리구요."

그렇게 탄생한 그림 40여점을 그는 '고통과 환희를 변주하는 자세'로 일반에 내보인다.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28일부터 다음 달 13일까지 여는 그의 열 일곱 번째 개인전을 통해서다.

전시 주제는 '비움과 채움'.

수제 한지에 그린 10m 크기 '인생'을 비롯해 '명상' '만남' '정원' '그리움' 등 깊고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는 대형 채색화들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화의 무게감도 느껴진다.

"한국화의 전통적인 소재나 재료, 기법까지도 작가가 자유로운 상태에서 판단해 어떻게 선택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무엇을 그릴까보다는 어떻게 그려 한국적인 것을 세계화시킬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편이지요."

홍익대 동양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임씨는 "우리다운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 바로 세계화"라며 "인생의 채움과 비움의 변증법적 과정을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작품가격은 호당 30만원.

(02)734-0458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