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 시인 >

"풋고추가 그렇게 맛있었어요?" 텔레비전을 본 사람마다 물어왔다.지난 5월11일 밤,박경리 선생 추모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이후,여기저기서 받는 질문이다.학생들과 함께 시를 공부하는 인터넷 카페에서도 풋고추 이야기가 단연 화제였다.나는 카메라 앞에서 박경리 선생이 새롭게 발견한 한(恨)의 미학이나 생명론에 비중을 두었는데,프로듀서의 판단은 달랐던 모양이다.내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사소한 체험'을 골라 다큐멘터리의 후반부에 배치했다.

지난 5월5일 선생께서 타계했을 때,나는 장례식장 한 구석에서 15년 전 원주시 단구동을 떠올리고 있었다.그때 나는 시사주간지 기자였다.1994년 8월 15일,25년 만에 '토지'가 완성되던 그날 새벽 나는 원주시 단구동 선생 댁 근처에서 사진기자와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그야말로 어렵게 사전 허락을 받고 '토지'의 마지막 순간을 취재했던 것이다."이상해요.너무 오래 써와서 그런지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배만 살살 아프네요.

"'토지'의 마침표를 찍은 대가의 '한 말씀'은 예상 밖이었다.하지만 곧이어 "나는 '토지'의 도구였을 따름"이라며 동학과 민족성,생명 사상,일본론 등에 대한 사유를 털어놓았다.

'토지'가 완성되던 그해,여러 차례 원주를 찾았다.선생의 집 앞에는 텃밭이 있었는데,그 텃밭이 또 하나의 원고지였다.선생은 원고지 칸이 메워지지 않을 때면 텃밭에 나가 채소를 가꾸었다.선생은 "원주로 내려오지 않았으면 '토지'는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원주에서 생명의 근원인 땅을 만났고,원주에서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작가정신을 벼렸다.선생은 "나는 남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고 싶지 않다.그렇다고 남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토지'가 막바지로 향하던 그해 초여름,선생을 찾아 뵌 적이 있다.인사를 드리고 현관 문을 나서려는데 선생께서 "잠깐" 하시더니 텃밭으로 들어가시는 것이었다.풋고추를 한아름 받아들고 나오면서 나는 약간 흥분해 있었다.취재차에 오르자마자,사진 기자에게 양해를 구했다."원주시를 벗어나서,제일 먼저 나오는 식당에 들어가자".나는 풋고추가 먹고 싶었던 것이었다.식당에 들어가자마자 된장(찌개가 아니라)부터 시켰다.아,고추는 달고 시원하고 매웠다.사각,씹히는 소리까지 새콤했다.선생을 뵙고 온 며칠 뒤 나는 시를 한편 썼다."'토지'가 키운 토지에서,'토지'를 키운 토지에서 땡볕을 받고 자란 그 풋고추는 달았습니다.달고 매웠습니다."(졸시 '농업박물관 소식-식탁에서 길을 묻다')

선생께서 고향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통영 미륵산 기슭에 누우신 뒤에도 풋고추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다.연일 계속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를 보면서,박경리 선생의 풋고추가 떠올랐다.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지 않는다.모든 길은 식탁으로 통한다.모든 길은 우리 입으로 통한다.그러니 식탁에서 질문해야 한다.이 먹을거리들이 어디서 왔는가.이 먹을거리를 누가,어디서,어떻게 키웠는가.또 누가,어디서,어떻게 가공하고 유통하는가.

식탁에서 드리는 감사의 기도가 바뀌어야 한다.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고맙다는,혹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약으로 알고 먹겠다는 감사의 기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가,이 이 음식은 또 다 어디로 가는가라고 물어야 한다.모든 음식이 내가 15년 전에 맛보았던 박경리 선생의 풋고추 같다면,그리하여 원산지와 생산자,생산방식과 유통 경로를 알 수 있다면,바로 그때가,바로 거기부터가 새로운 문명이라고,나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