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 이 산에 올라 장래를 꿈꾸었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 바로 이 바위에 걸터앉아,아버지처럼 훌륭한 공직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곤 했지요."

지난달 30일 서울 북악산에 오른 최홍건 중소기업연구원장(65)이 정상 부근에 다다르자 무명(無名)의 너른바위를 가리켰다.

50년 전쯤 청운의 꿈을 품었다는 그 바위다.

그때만 해도 최 원장 자신이 평생을 산과 더불어 살리라는 것을 짐작이나 했을까.

최 원장의 인생은 산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산에서 꿈을 꾸었고 지금도 산을 꿈꾸고 있는,영락없는 산악인이다.

"산에 오르면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도 편해집니다.

폭 안긴다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요.

그 맛에 취해 주말이면 나도 모르게 배낭을 꾸리게 됩니다."

실제 최 원장의 수첩은 매주 등반 스케줄로 빼곡하다.

이달 중순에는 세계중소기업학술대회 참석차 캐나다를 방문하면서 일정이 없는 주말을 이용,현지 '캐나디안 로키'에 오를 참이다.

효자동에 살았던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부친을 따라 처음 산을 탔다.

당시 심계원장(현 감사원장)이던 부친은 일요일이면 종종 최 원장을 데리고 집과 멀지 않은 북한산이나 북악산 등을 올랐다.

틈틈이 실력이 늘어 고등학생 시절 이미 로프를 매고 북한산 인수봉 등을 기어오르는 수준이 됐다.

대학(서울대 법대)에 진학한 뒤에는 산악부에 들었다.

당시 산악부원들이 겨울산을 오르고 하산할 때면 스키를 타는 것이 유행이었다.

스키에도 맛을 들인 최 원장은 1963년 '서울대 스키부'를 창설했고,내친 김에 이듬해 강원도에서 열린 전국 동계체전에 참가했다.

성적은 종합 준우승.

공직(상공부)에 들어선 뒤로는 산을 자주 타기가 어려웠다.

대신 격무(激務)를 새로운 등반코스로 삼아 씨름하는 날이 이어졌다.

"공직생활에서도 산을 타던 버릇이 묻어 나오는 걸 많이 느꼈어요.

산에 오르면 갈 길(목표)을 정하고,그러면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개척하고 인내해야 정상에 도달하는 법이거든요."

1999년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 차관을 마치고 한국산업기술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한 이후 젊은 사람도 엄두를 내기 어려운 '세계의 지붕'들을 넘보기 시작했다.

유럽 최고봉인 러시아 '엘브르스(5642m)'를 비롯해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895m)',히말라야 '안나푸르나(8091m)' '임자체봉(6189m)',알프스 '몽블랑(4807m)' 등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산들을 모두 2000년대 초반 등반했다.

2006년부터는 박영석 엄홍길 한완용 등 쟁쟁한 산악인 모임인 한국산악회 회장을 맡고 있다.

회장이 되고 나서 산에 대한 열정은 더욱 강렬해졌다.

고령화 시대를 맞아 노인들도 꿈과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로 지난해 5월에는 자신을 포함,60세 이상 노인들로만 구성한 '실버원정대'를 이끌고 에베레스트 최고령 등반 기록을 달성했다.

실버원정대 출발에 앞서 한라산 설벽(雪壁)에서 동계훈련을 할 때는 눈사태가 덮치는 바람에 200m 이상을 휩쓸리며 눈더미 속에 파묻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올 1월에는 또다시 남극 원정에 나서 남극 최고봉인 '빈슨 메시프(4897m)' 등정에 성공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쯤 되면 산에 관한 한 아마추어로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셈인데,그는 여전히 겸손하다.

"산은 정상에 다다를수록 경사가 급해집니다.

경사가 급해지면 몸을 숙이지 않고는 오를 재간이 없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정상을 끝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안전한 하산까지 마무리해야 비로소 등산에 성공하는 것이지요."

그는 요즘 꿈이 하나 더 늘었다.

영화인이 되는 것이다.

한국산악회가 주관하는 산악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로 나선 것.9월부터 인도 '마힌드라 계곡'의 2000m에 달하는 거벽에서 촬영을 시작한다.

지난달 산악영화제로 유명한 이탈리아 트렌토 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임일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을 예정이다.

로프 등 간단한 장비만으로 산을 타는 정통 '알피니즘(Alpinism)'을 표방하는 이 영화는 실제 맨몸으로 거벽에 오르는 산 사나이들의 숨소리를 고스란히 담아낼 예정이다.

최 원장은 "칸 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에 출품할 계획"이라며 "산악인들의 정신세계를 담아내는 데 심혈을 기울일 작정"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