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 < 한국학중앙硏 학예연구원 >

세종에게도 소 교역 문제는 풀기 어려운 숙제였다.

1432년 5월 명나라 황제는 '소 1만마리를 압록강 건너 요동지역으로 보내라'는 내용의 칙서를 보내왔다.

큰 소 1만마리를 일시에 보내라는 것은 수용하기 힘든 요구였다.

하지만 논의 끝에 세종은 '농사짓는 데 매우 중요하고,나라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소를 명나라 요구대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사실 명나라에서 소 교역을 요구할 거라는 소식은 이미 일 년 전에 전해졌다.

대책회의에서 세종과 신하들은 명나라의 요구를 그대로 따라야 할지,감면 요청을 해야 할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회의 중에 '나라 안의 소들이 마침 병에 걸려 많이 죽은 탓에 보낼 수 없다'고 버텨보자는 제안도 나왔다.

세종은 그 제안에 반대했다.

"우리나라가 그동안 정성껏 명나라와 외교를 해왔는데,이 한 가지 일에서 거짓말을 한다면,마치 아홉 길의 산을 쌓다가 한 삼태기의 흙을 더하지 않음으로써 그동안의 공력까지 무너질 수 있다"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여기서 보듯,세종은 소 교역 문제의 핵심이 신뢰(信賴)에 있다고 보았다.

건국 이래로 조선은 명나라의 '안보우산'에 들어감으로써 대외전쟁을 막는 한편,민산(民産) 증진에 국력을 집중하려는 정책을 취해왔다.

그러나 명나라는 조선에 대한 불신의 눈길을 여전히 거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 세종은 이 까다로운 외교적 난제를 어떻게 풀었을까.

'마지막 한 삼태기'를 쌓는 데 장애물은 무엇이었고,세종은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나.

첫째 신민(臣民)들의 마음을 얻는 일이었다.

소 교역문제와 관련해 처음 열린 1431년 1월 회의의 안건은 소를 낸 민가에 어떤 보상을 할 것인가였다.

이 회의에서 세종은 "마땅히 인민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물어서 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정에서 보상책을 결정해놓고 따르라고 할 경우 자칫 "온 천하에 소요를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국왕의 "지성사대가 지나치다"고 비판하는 신하들을 설득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황희 등을 제외한 대다수 신료들은 절반만 보내자는 의견에 찬성했다.

하지만 세종은 "지금 소를 갖추어 바치는 일이 매우 어렵긴 하나,국가의 안위(安危)보다는 덜 중요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소를 모아 보내고,국내의 어려운 사정을 세세히 적어보내는 것이 비록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국가안보를 튼튼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둘째 명나라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간파하는 일이었다.

당시 신료들은 명 황제가 1만마리 소를 모두 원하지 않을 것이니 3분의 1이나 2분의 1만 보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칙서를 다시 가져오게 해 꼼꼼히 살펴본 세종은 "그 내용이 자세하고 간곡하다"면서 소를 1000마리 단위로 해 요동에 보내라고 지시했다.

조선의 태도를 떠보려는 황제의 의도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종의 판단은 적확했다.

그로부터 5개월 후에 보내온 편지에서 명 황제는 '조선의 탁월한 현왕(賢王)의 판단에 감복했다'면서 지금까지 보낸 6000마리면 족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앞으로는 칙서에 명시된 물건만을 사신들에게 주라는 말도 덧붙였다.

조선의 큰 골칫거리인 사신들의 잡다한 요구를 물리칠 근거를 마련해준,'외교적 성과'였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의 핵심은 신뢰의 부재에 있다.

미국은 물론이고 이명박 정부 자체를 믿지 못하겠다는 국민들 앞에서 '자율규제'니 '재협상에 준하는 것'이니 하는 설명은 제한적인 효과밖에 없을 것이다.

그에 앞서 국민의 마음을 얻고,미국과의 신뢰도 쌓을 수 있는,보다 정성어린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