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파멸에의 숨막히는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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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일은 이렇게 돌아가고 말았다.
파국을 향한 자기파괴인 것을….국민 소득 수준에 걸맞은 규칙과 질서가 불편하다며 아우성이 터지는 상황에 해설이 필요하겠는가.
광장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할퀴어 깊은 생채기를 내는 중이고, 밀실에서는 너나 없이 기회주의자로 처신하는 것이 이골이 난 터다.
광장과 밀실은 그렇게 서로를 봉쇄하는 중이다.
정치는 무능하며,방송과 언론은 특정 집단의 사유물이 된 지 오래다.
기업들은 작은 이익에 눈멀고,중산층은 오블리주 따위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공론(公論) 또한 산산조각이 났다.
어떤 집단이건 서로를 비아냥거리고 삿대질하며 조롱을 퍼붓고 상처를 내는 방법에만 골몰해 있는 것이 작금의 한국이다.
논리를 잃은 언어들은 작고 예리한 면도날처럼 피흘릴 상대를 찾아 바람에 흩날릴 뿐이며 정당들은 기회주의자들의 은신처에 불과하다.
기적은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한국은 이미 너무 높은 곳까지 날아올라와 스스로 제멋에 겨워 우쭐대며 애송이 춤을 추고 있는 하나의 어릿광대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집단 광기요 대중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길거리의 어린 학생이 "놀아줘! 놀아줘!"라며 경찰을 희롱한다지만 청와대에 초청된 목사가 시위대를 "사탄!"이라고 부르는 것도 정말 비열한 언어희롱이다.
아래 위가 다를 바 없고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다.
요즘 한창 신이 난 진중권의 시대규정을 잠시 빌리자면 포스트 모더니즘 그 자체다.
좌파 그룹은 밀실의 촛불을 광장에까지 들고 나와 저주의 굿판을 벌이고, 공영방송이라는 것은 공론의 주제를 저급의 몰래 카메라로 전락시키는데 솜씨를 발휘하는 중이다.
방송이 집단 사유물이 되었다는 것이 기이할 따름이다.
그것을 또 언론 자유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결국 지성의 수준이 문제다.
시민행동을 정당화하는 그 어떤 호교론을 들고나오더라도 춧불시위는 이미 그 자체로 폭력이 되고 말았다.
정치를 부정하고 선거를 부인하고 다수결을 부인하고 오로지 목소리의 크기로 정의(正義)의 기준을 정하기로 들면 정의의 원칙을 세웠던 롤즈(Rawls)도 월저(Walzer)도 고개를 돌릴 테다.
촛불 시위를 부채질하고 있는 대학교수라면 이 이름들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다중의 이름으로 국민주권을 가차하는 것도 가관이다.
누가 그대들에게 국민을 대표할 권력을 주었다는 말인가.
쇠파이프를 들지 않았다고 해서 비폭력인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평온할 생활을 영위할 시민들의 권리를 박살내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권력임을 거부당하는 것은 무능의 결과라고 하더라도 시민의 안온한 생활조차 지키지 못하면서 정부 역할까지 포기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좌파를 비난하는 것으로 자신이 시장세력이나 되는 것처럼 위장해왔던 기업이나 중산층이나 지식층도 기만적인 촛불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 자신은 과연 우리가 이루어낸 수준에 걸맞은 제도와 의식을 체화하고 있는 것인가.
행동은 비열하고 절제와 교양이랄 것조차 없기 때문에 바로 그 수준에 어울리는 대중의 반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한국인에게 걸맞은 사회수준이 일본이나 서구 선진국이 아닌 것은 분명해졌다.
오히려 한때 우리보다 잘 살았던 필리핀이나 미얀마나 태국보다 약간 아래에 위치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지 모르겠다.
모두가 그 '아무렇게나 해도 좋은' 편안한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이렇게 안달인 것이다.
물론 거리의 촛불이건,하역장의 화물연대건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층조차 이전투구인데 누가 먼저 양보하고 절제하며 물러날 것인가.
프롬이 '네크로필리아'라고 이름붙인 그 은밀한 자기파괴의 유혹에 모두가 취해 있는 것을….
jkj@hankyung.com
파국을 향한 자기파괴인 것을….국민 소득 수준에 걸맞은 규칙과 질서가 불편하다며 아우성이 터지는 상황에 해설이 필요하겠는가.
광장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할퀴어 깊은 생채기를 내는 중이고, 밀실에서는 너나 없이 기회주의자로 처신하는 것이 이골이 난 터다.
광장과 밀실은 그렇게 서로를 봉쇄하는 중이다.
정치는 무능하며,방송과 언론은 특정 집단의 사유물이 된 지 오래다.
기업들은 작은 이익에 눈멀고,중산층은 오블리주 따위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공론(公論) 또한 산산조각이 났다.
어떤 집단이건 서로를 비아냥거리고 삿대질하며 조롱을 퍼붓고 상처를 내는 방법에만 골몰해 있는 것이 작금의 한국이다.
논리를 잃은 언어들은 작고 예리한 면도날처럼 피흘릴 상대를 찾아 바람에 흩날릴 뿐이며 정당들은 기회주의자들의 은신처에 불과하다.
기적은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한국은 이미 너무 높은 곳까지 날아올라와 스스로 제멋에 겨워 우쭐대며 애송이 춤을 추고 있는 하나의 어릿광대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집단 광기요 대중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길거리의 어린 학생이 "놀아줘! 놀아줘!"라며 경찰을 희롱한다지만 청와대에 초청된 목사가 시위대를 "사탄!"이라고 부르는 것도 정말 비열한 언어희롱이다.
아래 위가 다를 바 없고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다.
요즘 한창 신이 난 진중권의 시대규정을 잠시 빌리자면 포스트 모더니즘 그 자체다.
좌파 그룹은 밀실의 촛불을 광장에까지 들고 나와 저주의 굿판을 벌이고, 공영방송이라는 것은 공론의 주제를 저급의 몰래 카메라로 전락시키는데 솜씨를 발휘하는 중이다.
방송이 집단 사유물이 되었다는 것이 기이할 따름이다.
그것을 또 언론 자유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결국 지성의 수준이 문제다.
시민행동을 정당화하는 그 어떤 호교론을 들고나오더라도 춧불시위는 이미 그 자체로 폭력이 되고 말았다.
정치를 부정하고 선거를 부인하고 다수결을 부인하고 오로지 목소리의 크기로 정의(正義)의 기준을 정하기로 들면 정의의 원칙을 세웠던 롤즈(Rawls)도 월저(Walzer)도 고개를 돌릴 테다.
촛불 시위를 부채질하고 있는 대학교수라면 이 이름들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다중의 이름으로 국민주권을 가차하는 것도 가관이다.
누가 그대들에게 국민을 대표할 권력을 주었다는 말인가.
쇠파이프를 들지 않았다고 해서 비폭력인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평온할 생활을 영위할 시민들의 권리를 박살내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권력임을 거부당하는 것은 무능의 결과라고 하더라도 시민의 안온한 생활조차 지키지 못하면서 정부 역할까지 포기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좌파를 비난하는 것으로 자신이 시장세력이나 되는 것처럼 위장해왔던 기업이나 중산층이나 지식층도 기만적인 촛불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 자신은 과연 우리가 이루어낸 수준에 걸맞은 제도와 의식을 체화하고 있는 것인가.
행동은 비열하고 절제와 교양이랄 것조차 없기 때문에 바로 그 수준에 어울리는 대중의 반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한국인에게 걸맞은 사회수준이 일본이나 서구 선진국이 아닌 것은 분명해졌다.
오히려 한때 우리보다 잘 살았던 필리핀이나 미얀마나 태국보다 약간 아래에 위치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지 모르겠다.
모두가 그 '아무렇게나 해도 좋은' 편안한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이렇게 안달인 것이다.
물론 거리의 촛불이건,하역장의 화물연대건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층조차 이전투구인데 누가 먼저 양보하고 절제하며 물러날 것인가.
프롬이 '네크로필리아'라고 이름붙인 그 은밀한 자기파괴의 유혹에 모두가 취해 있는 것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