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원 < 프로바둑기사·방송인 myung0710@naver.com >

"하아,하아,이러다 잠들면 동사(凍死)하겠구나."

걷는 내내 몸이 점점 얼어붙고 있었다.신기한 건 걷고 있는데도 자꾸 잠이 쏟아진다는 것이었다.잠깐이라도 앉아서 쉬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3 때 수학능력시험을 며칠 앞두고 있던 2000년 11월 첫날이었다.새벽 5시,설악산 대청봉을 오르기 위해 프로 기사 산악회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모두들 전날 저녁 늦게 도착해 산 근처 숙소에서 잠을 청한 터였다.잠자리가 바뀌면 첫날은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나는 그날도 채 두 시간을 자지 못했다.숙소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제공했지만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대청봉으로 향했다.

등산 경험이 없는 나는 등산로에 도착했을 때 준비의 부족함을 느끼기 시작했다.먼저 해 뜨기 전 어둠에 잠긴 산은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다행히 일행 중 손전등을 가져온 사람들이 있어 불빛을 보고 방향을 가늠하며 올라갔다.앞도 안 보이고 길도 고르지 않아 돌을 밟을라치면 비틀비틀 쓰러질 지경이었다.

멀미가 찾아왔다.그래서 등산하는 내내 물만 마셨을 뿐 야채나 과일,초콜릿 같은 건 입에 대지도 못했다.

해가 뜬 후의 등산은 그런 대로 즐거웠다.같이 간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산을 오를 수 있었다.그러나 높이 올라갈수록 급격히 낮아지는 온도 때문에 등산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나의 등산 준비 중 가장 큰 문제점은 겨울 산에 오르면서 면 티셔츠에 일반 점퍼를 걸쳤다는 것이었다.땀을 많이 흘렸는데,입은 옷이 체온을 유지해 줄 수 있는 옷이 아니다 보니 땀에 젖은 옷이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게다가 잠까지 쏟아졌다.

다행히 동료 프로 기사들이 힘을 북돋워 줘 간신히 정상에 올라섰다.어차피 내려갈 수 없으니 죽기 살기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정상을 100m쯤 남겨 뒀을 때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깡마르고 까맣게 탄 어린이가 내 옆으로 씩씩하게 올라가는 걸 보고 힘을 내야 했다.

내려오는 길은 수월했다.이미 사점(死點)을 넘어선 때문일 터다.

그때 나는 '다시는 산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요즘도 가끔 지인들과 관악산에 오른다.오를 때는 힘들지만,정상을 밟는 뿌듯함이 이만저만 즐거운 게 아니다.

그렇지만 정상에서 살림을 차려 마냥 살 수 없다는 이치도 깨달았다.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내가 '성격 좋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산행에서 터득한 내공 때문이 아닐까.

이번 주엔 누구랑 산에 갈 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