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계 지도자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흰 수염을 기르고 갓을 쓴 두루마기 차림의 한양원 한국민족종교협의회 회장(86)이다.

오는 2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리는 '제5회 민족종교 국제학술대회'를 알리기 위해 지난 17일 열린 기자간담회에도 한 회장은 특유의 한복 차림으로 나와 겨레의 얼을 살려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외래 종교인 기독교,불교,천주교,유교 등이 기성 종교로서 주인 행세를 하는 반면 우리 민족 안에서 자란 '민족 자생 종교'들은 주인 노릇을 못하고 있습니다.

일제가 우리 말과 글,성과 이름까지 갈면서 민족혼을 말살했고,해방 후에는 서양문명이 지배하면서 우리 혼과 정신마저 잃고 있으니 참 걱정입니다."

한 회장은 그래서 아흔을 앞둔 노구에도 불구하고 '겨레얼 지키기 국민운동'을 6년째 전개하고 있다.

각급 학교ㆍ단체 등을 대상으로 겨레얼 살리기를 위한 전국 순회강연을 하는 것은 물론 해외 강연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 겨레얼의 핵심은 하늘과 땅과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사는 것"이라며 "평화민족으로서 상극의 시대를 물리치고 상생의 평화세계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제 때 전남 남원에서 창교돼 '지리산 청학동 선비'로 유명한 갱정유도회 최고지도자(도정ㆍ道正)인 한 회장은 일제 때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다.

어릴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고 1946년 갱정유도회에 입도(入道)해 3년 전 도정에 추대됐다.

1985년 민족종교협의회를 창립해 민족종교를 7대 종단의 대열에 올려 놓은 그는 한국 현대종교사의 산 증인이다.

여러 갈래로 흩어진 민족종교 계열의 종단들로 민족종교협의회를 구성해 20년 넘게 이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천도교,증산교,원불교 등의 역대 지도자들과도 폭넓게 교류해왔다.

문선명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 총재에게는 반 년 동안 주역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 한경직ㆍ나운몽ㆍ강신명 목사 등 작고한 개신교 지도자들과도 교분이 두터웠고,불교계에선 입적한 이청담ㆍ손경산 스님으로부터 의현ㆍ월주ㆍ지관 스님 등 전ㆍ현 총무원장에 이르기까지 두루 사귀어왔다.

그는 또 이승만 전 대통령으로부터 이명박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을 모두 만나본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1965년 현충일에는 갱정유도회원 500명을 서울로 불러 올려 '원미소용(遠美蘇慂) 화남북민(和南北民)'이라는 전단지를 뿌리며 시위하다 반공법 위반으로 구금됐죠.전단지의 내용이 '미국ㆍ소련의 꾐을 멀리 하고 남북민이 화합하자'는 것인데 보안대에서 '미국을 멀리 하고 소련을 활용하자'는 것으로 잘못 해석했던 것이죠.당시 박정희 대통령 앞에까지 끌려갔는데 이판사판 심정으로 '이 정도 한문도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무슨 일을 하느냐?'고 큰소리 쳤지요."

이 일로 석 달 이상 구금됐다가 종교계 지도자들의 탄원으로 풀려났다.

그는 미국 쇠고기 문제로 연일 벌어지고 있는 촛불시위에 대해서는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고 했다.

민족종교를 홀대하는 데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일제 강점기에 조국 독립을 위해 가장 헌신했던 것이 민족종교인데도 이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천도교가 3ㆍ1 운동에 앞장서고 대종교가 상해임시정부를 주도했으며 지금은 없어진 원종교ㆍ청림교를 비롯해 민족종교가 북만주에 설립한 학교가 20여개에 달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문한다.

수양(修養)의 방편으로 옛 선비의 차림새를 고수한다는 한 회장은 아흔을 바라보는 고령에도 자세가 꼿꼿하고 목소리도 우렁차다.

손과 얼굴에선 검버섯을 찾아보기 어렵고 기억력도 젊은이에 못지 않다.

건강비결을 묻자 한 회장은 "나름대로 하는 운동이 있다"면서도 "오늘은 내가 아쉬워서 점심을 사지만 그걸 배우려면 당신(기자)들이 술을 사라"며 웃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