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중연 < 한국정보보호진흥원장 jyhwang@kisa.or.kr >

시골 은행에서 한 할머니와 은행 여직원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여직원이 비밀번호를 묻자 할머니가 작은 목소리로 "비둘기"라고 대답했다.황당한 은행 여직원은 비밀번호를 재차 재촉했지만 할머니는 입을 가리며 한 번 더 "비둘기"라고 했단다.할머니의 비밀번호는 '9999'였던 것이다.

며칠 전 아내로부터 옆집에 사는 할아버지가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문 밖에서 몇 시간 동안 고생했다는 말을 전해듣고 문득 그 우스개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옆집 할아버지는 그 은행 할머니처럼 외우기 쉬운 번호를 사용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날로그 시대 우리 생활에서 비밀번호를 사용하던 것은 기껏해야 여행용 가방이나 장롱,사무실 책상 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비밀번호 없이는 디지털 생활을 하기도,사이버 공간의 커뮤니티에 들어가기도 힘들다.필자가 가입한 포털 사이트,금융기관,연구기관 등만 해도 수십개나 된다.그렇다고 이 모두의 비밀번호를 하나로 통일하자니 해킹이라도 당할 경우 한꺼번에 뚫려버릴 우려가 있고,쉽게 노출될 수 없는 비밀번호를 조합해서 기록해 놓고 사용한다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다.

우리는 아무에게나 사생활과 비밀들을 털어놓지 않는다.심지어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도 비밀은 있다.연인 사이에 아무 거리낌 없이 비밀번호를 공유하는 커플들도 있다.물론 아날로그적 감정의 차원에서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인지도 모른다.그러나 디지털 정보화 사회에서 비밀번호를 공유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다.위험천만한 일이다.특히 그 비밀이 개인의 신상,인격,재산 등과 관계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아직도 아무 생각없이 비밀번호를 기억하기 쉽게 모든 사이트에 동일하게 설정하거나,자신의 비밀번호를 쉽게 노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정보화 사회와 안전장치에 대한 인식 부족 때문이다.

좋은 비밀번호란,나는 기억하기 쉬우면서도 타인이 유추하기 힘든 것이다.숫자,영문 대ㆍ소문자,특수문자 등 여러 가지 문자 종류를 섞어 8자리 이상으로 만들고,주기적으로 변경하기를 습관화해야 한다.

비밀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비밀번호는 그것에 이르는 통로다.동시에 그것을 잠그는 자물쇠이고 그것을 보호하는 마지막 수단이기도 하다.자신의 비밀번호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면 각종 사이트에 저장된 내 개인정보는 사이버 공간 곳곳에 떠돌며 예기치 못한 피해로 되돌아올 수 있고,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유없는 피해자,범법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