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카가와 유키코 <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 교수 >

'응석부리기 구조'란 책은 1971년의 베스트셀러였다.

당시 일본은 고속 성장으로 경제면에선 미국과 유럽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하지만 서구와 너무나 다른 문화가 불안 요소였다.

도쿄대 정신과 교수였던 저자 도이 다케오는 '상대방에게 당연히 호의를 기대하는 사회구조',일종의 '응석부리기'가 통하지 않으면 등지거나 삐치는 심리 구조를 일본의 특징으로 제시했다.

국제사회에선 응석부리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강조한 것이다.

일본에선 아직도 자기책임을 이야기할 때 '응석부리기'가 거론되곤 한다.

'정부가 어떻게든 해주겠지','회사가 살려 주면…','학교에선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식의 말들이 응석부리기의 변형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촉발된 한국의 촛불시위는 이미 모든 불만의 표출 창구로 발전했다.

시위 열기는 등지거나 삐친 정도가 아니라 격렬한 '분노'이지만 외국인 눈에는 곳곳에서 한국판 응석부리기가 엿보인다.

미국이 한국과 자유무역협정(FTA) 교섭을 벌이면서부터 가장 큰 관심을 보였던 게 쇠고기 시장의 전면 개방이었다.

한국이 미국산 쇠고기 검역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 분명하다.

당연히 검역에는 엄격한 규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쇠고기 개방 협상에서 한국은 모든 걸 납득하고 서명했다.

'일단 우리가 협상을 타결하면 다음은 정치인들이 알아서 하겠지'라는 생각을 했다면 정부 관료들은 전문가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일종의 응석부리기를 한 셈이다.

쇠고기 개방 합의 직후 한국은 자신만만했다.

자신이 추가협상 등을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를 점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촛불시위에 밀려 추가협상을 추진하면서도 '(한국은 미국에 특별한 나라니까)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니까) 반드시 추가협상에 응할 것'이란 생각을 한 듯하다.

이것도 응석부리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응석부리기는 아이와 부모 관계에서나 통한다.

그러나 민주화가 진전된 한국에서 국민과 정부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 관계가 아니다.

정치의 일방통행을 시민들이 견제하는 것은 좋지만,철저한 증명과 전문적 지식을 기초로 한 대안 제시가 없는 감정 폭발은 중우(衆愚) 정치로 비용만 키울 뿐이다.

세계 경제가 순조롭다면 그 정도 조정 비용은 성장이 흡수해 주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하물며 국제사회에서 한국과 선진국 관계는 부모 자식 관계가 절대 아니다.

삐친다고 해서 부모가 아이를 버리는 일은 없지만 국제사회는 국익에 따라 냉혹하게 움직인다.

한국에 개발도상국이란 핸디캡을 주려는 나라는 이미 없다.

한국은 선진국들과 대등한 교섭 상대로 간주되고 있다.

한국 자신도 그것을 바라왔을 것이다.

한국이 정정불안에 빠져 있는 동안 세계는 환경문제라는 큰 과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진국 관심도 여기에 집중돼 있다.

한국이 방대한 조정 끝에 선진국들과 FTA를 맺더라도 환경보호나 에너지 절약 기준이 일제히 강화돼 새로운 무역장벽이 된다면 원래 그만큼 높지도 않았던 선진국과의 관세 낮추기 교섭은 아예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다.

환경이나 에너지 규제는 한국 산업경쟁력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안이다.

여기서도 개도국임을 주장하는 '응석부리기'는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진국들 논의에 적극 참여해 적절한 위치에서 개도국을 주도하는 것이야말로 국제사회가 기대하는 한국의 역할이다.

이번 촛불시위는 국내에서도 국외에서도,한국판 '응석부리기'의 악순환을 반성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단순한 정책전환이나 인적쇄신이 아니라 권리와 의무가 불가분한 성숙 사회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한국은 '응석부리기'를 넘지 않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