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원 < 프로바둑기사·방송인 myung0710@naver.com >

인생은 생방송.흘러간 중계는 주워 담을 수 없다.녹화 방송에서는 용서되지 못하는 작은 실수들이 생방송에서는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하다.

흔히 바둑에 인생이 담겨 있다고 한다.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 말이 생겨났겠지만 그 중 하나는 인생도 바둑도 생방송이라는 의미일 것이다.바둑에선 한 수도 무를 수 없기에,순간 순간이 선택의 기로이기에,인생이나 생방송이나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순간의 선택마다 생각하는 즐거움,짜릿함이 있다.다만 바둑은 한 판을 두고 나서 얻은 교훈으로 다음 판을 두어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그것이 바둑의 또 다른 재미다.

며칠 전 내가 중계를 맡고 있는 '2008 한국 바둑 리그' 대국 해설을 위해 사이판에 다녀왔다.이 곳은 미국령 섬이어서 원주민들은 일하지 않아도 정부의 충분한 지원을 받는다.

의식주에 지장이 없는 삶을 누리고 있다.

좋은 교육도 받고 있다.이렇게 좋은 사회 보장 덕분인지 더운 날씨에 굳이 일하겠다는 사람이 많지 않다.일곱 가지 푸른빛을 가졌다는 예쁜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유유자적 놀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 하며 현지인들을 이해하기도 한다.그렇지만 나태해지기 쉽다.그 곳 원주민들 중 일부는 변화 없는 삶이 무료해 마약을 탈출구로 삼기도 한다.

그들은 생방송에서 느끼는 역동성,스스로 선택하고 노력해 뭔가를 이뤄 내는 성취감을 모르는 것 같다.

생방송을 즐기고 있는 나로서는 그들이 조금 측은해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광고 카피 중에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란 말이 유행했다.

나는 이 광고 카피를 꼭 어디론가 떠나지 않더라도 열심히 내 인생의 생방송 한 편을 즐기고 다음 생방송을 위해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라는 의미로 생각했다.

선물의 종류는 매우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바쁘게 생방송을 했다면 며칠간 휴대폰을 꺼 버린 채 아무 것도 안 하고 집에서 먹고 자고 산책하고 뒹구는 시간을 선물할 수도 있고,평소 갖고 싶었던 물건을 나에게 선물할 수도 있다.

또 그간 읽지 못했던 책을 읽거나 만나지 못했던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100가지도 넘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바쁠 때 짬을 내 즐기는 게 진정한 '여유'가 아닐까 싶다.

나는 바쁘게 돌아가는 삶의 생방송을 사랑한다.

기원(棋院)과 방송으로 이어지는 내 삶의 생방송이 나를 살찌우는 활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