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이익을 실현하는 외국계 펀드들이 잇달아 현대백화점 그룹 지분을 사들이고 있다. 이들 펀드는 앞으로 이사선임 등 적극적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 현대백화점 그룹의 순환출자 구조에 변화가 있을 지 주목된다.

24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영국 몰리(Morley)펀드는 지난 23일 현대백화점 주식 115만2051주(지분율 5.08%)를 투자 목적으로 보유중이라고 금융감독원에 신고했다. 몰리는 영국 최대 보험회사인 아비바(Aviva)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으며, 운용 총액이 300조원을 넘는 초대형 투자사다. 몰리가 한국 내 상장기업 지분을 5% 이상 취득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몰리 펀드는 홈페이지를 통해 "장기 투자를 위해선 회사 경영이 성실하고 수준높게 이뤄져야 한다"며 "주주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투자 성과를 높이기 위해 회사의 지배구조에 기여하도록 노력한다는 투자원칙을 갖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사회책임투자(SRI) 연구ㆍ컨설팅 업체 서스틴베스트 류영재 대표는 "영국계 자본의 경우 수탁자의 의무를 충실히 하기 때문에 지분 취득 이후 주주권리를 강하게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몰리는 장하성 펀드처럼 기업 지배구조 개선에 적극 나서고 있어, 언제든 이사ㆍ감사 선임 등 경영참여를 요구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앞서 지난 17일에는 장하성 펀드를 운용하고 있는 라자드에셋매니지먼트는 현대백화점 그룹 핵심 계열사 현대H&S 주식 28만3441주(5%)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장 펀드 보유지분 가운데 일부는 미국 최대 연기금 캘퍼스의 자금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장 펀드는 현대H&S의 사외이사 선임 등을 놓고 회사측과 협의중이다. 이사 선임을 위해 향후 추가 지분 취득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백화점 그룹이 이들 펀드의 '관심종목'으로 떠오른 것은 복잡한 출자 구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현대백화점 그룹은 '현대H&S→현대백화점→현대쇼핑→현대H&S'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로 되어 있다. 지주사 역할을 하고 있는 현대H&S는 고(故) 정주영 회장의 3남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과 그의 아들인 정지선 회장, 정교선 이사가 각각 3.09%와 21.29%, 1.22%의 지분을 보유해 그룹을 지배하고 있다.

현대백화점 그룹은 지배구조가 선명하지 않은 탓에 회사의 주가가 실적이나 지분가치 등 펀더멘털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계속 제기돼 왔다. 따라서 이들 펀드가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것만으로도 주가에 긍정적이란 평가다. 특히 현대백화점의 모회사 역할을 하고 있는 현대H&S의 경우 시가총액이 장부가에도 미치지 않는 실정이다.

남옥진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현대H&S의 시가총액이 계열사 지분가치(4786억원) 이외 법인영업과 IT사업부 가치(2913억원), 임대부동산 가치(959억원)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유 현금만 13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난 23일 기준 시가총액 4466억원은 과도한 할인이라는 얘기다.

현대백화점은 소비경기 부진으로 유통업종의 매력이 감소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매력있는 종목으로 꼽힌다. 서정연 신영증권 연구원은 "백화점 가운데 고급 이미지가 가장 강한 현대백화점은 소비가 부진해도 꾸준한 실적을 낼 것으로 기대된다"면서 "최근 주가하락은 과도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들 펀드가 실제 지배구조개선을 요구한다 해도 실효성엔 의문이 제기된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순환출자 구조를 깨고 지주사로 전환하려면 수천억원의 비용이 발생할텐데 현대가(家) 입장에서 이런 비용을 지불할 의지가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회사측 관계자는 "몰리펀드로부터는 어떤 요구도 받지 않았고, 장하성 펀드와는 계속 의사소통을 하고 있어 지금 상황에서 (지배구조가)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고 전했다.

한경닷컴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