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vo! My life] 배영호 배상면주가 사장 ‥ 그림과 사진 덕분에 제가 변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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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회사에 출근해 공장과 영업 현장을 누비다 오후 10시에야 비로소 집으로 향했다. 휴일이면 전국의 전통술과 전통문화를 찾아 돌아다녔다. 등산 테니스 같은 그 흔한 취미 하나 없었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꿈에서까지 일과 씨름한 '워커홀릭'(workaholic.일중독자).바로 1년 전 배영호 배상면주가 사장(49)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변했다. 스스로도 "새롭게 눈을 뜬 지 1년밖에 안 됐다"고 말한다. 그의 아내인 최선주 관리.생산 담당 상무도 남편이 확 달라졌다고 인정할 정도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빛과 어둠의 교감을 표현하는 그림과 사진이 변화의 출발점이다. 그가 그림과 인연을 맺은 것은 전통술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전통술 제조 과정을 다룬 그림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워하던 차에 직접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틈틈이 써온 책에 넣을 '삽화'를 그리고 싶어 지난해 하반기부터 만학에 나섰다.
사실 배 사장과 그림은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초등학교 때 짜증내면서 미술시간을 보낸 게 전부입니다. 그림을 그리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어요. "
좋은 선생 밑에 좋은 제자가 나는 법.그가 미술과 친숙해질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좋은 개인교사(30대 화가)를 만난 덕인지 모르겠다. 지인을 통해 알게 된 미술 선생은 스케치,데생 등 기초과정을 마음대로 뛰어넘게 했다. "이번 주에는 판화 한번 시도해보자"는 식이다. 그림을 '즐기는'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해 미술에 마음을 열게 해준 것이다.
배 사장은 그림 그리기에 앞서 30분 정도 대상물을 응시한다. 처음에는 막막해도 조금 지나면 묘하게 형체가 보이고,물감을 섞으면서 찬찬히 들여다보면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그림은 '보는' 훈련이지 '손질' 훈련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지금도 매주 수요일 오후 미술 선생을 불러 두 시간씩 유화 지도를 받는다. 짬짬이 시간을 내 덧칠하고 주말이면 작품을 완성한다. 그 결과물들은 서울 양재동 본사 4층 사장실에 고스란히 걸려 있다. 사장실을 찾는 직원들에게도 거리낌없이 보여준다. 사무실에 붙어 있는 10평 남짓한 서재에도 각종 전통술 관련 서적,골동품과 함께 그가 그린 작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동안 일에 미쳤던 그가 이제는 그림에 푹 빠진 것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세상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딴짓'(그림 그리기)이 기다려져요. 이전까지는 눈을 5%밖에 쓰지 않았습니다. 뜨고만 있었지 본 게 아니었어요. "
늦게 배운 그림의 '플러스' 효과가 곳곳에서 나타났다. 과거에는 보이지 않던 세계에 대해 눈을 뜬 것도 큰 결실이다. "그림자,주변 물건 등 사람이 아닌 것을 그려야 인물이 드러납니다. 꾀를 부려 앞질러 가거나 다르게 처리하면 바로 (좋지 않은)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림은 정말 과학적이고 수학적이며 기획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그림을 그린 이후 경영도 훨씬 편해졌단다. "각종 프로젝트를 강행하다 보면 워커홀릭인 데다 성격까지 급하니 직원들이 허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면서 호흡이 길어지고 편안해졌어요.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생겼습니다. 직원에게도 '보는' 시간을 충분히 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0년만 일찍 그림을 시작했으면 경영도 훨씬 수월했을 텐데…."
배 사장은 멀리 있는 대상물을 직접 가서 그리기 힘들어 올초부터 사진에도 관심을 가졌다. 최근에는 200만원을 들여 고급 렌즈도 사고 해외 출장 때면 하루 일정을 비우고 주변 경관을 찍어댄다. 술과 관련한 이미지라면 무엇이든 담는다.
그림과 사진의 활용 계획도 세워놨다. 선선해지는 가을부터 술과 관련한 이미지를 그림으로 담아낼 생각이다. 1년 후 전시회를 갖기 위해서다. 직원들이 술 만드는 장면,전통주 재현 과정도 기록으로 남길 계획이다. 경기도 포천 공장 인근에 전통술의 모든 것을 담은 박물관을 건립하기 위한 '앞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의 꿈은 전통술로 세상을 바꿔보는 것이다. 전통술의 위상을 높이는 게 그 첫걸음이다. "와인도 별것 아닙니다. 0.1%의 마니아와 전문가들이 고급 문화를 형성하고 저변을 확대한 것입니다. 우리 전통술도 일본 사케(청주) 정도로 시장의 볼륨과 수준을 높인 뒤 해외 시장 공략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통술 문화 전도사다. "지금은 서구문명 때문에 서양술이 득세하고 있지만 한국술의 위력이 조만간 발휘될 것입니다. 그날을 위해 차근차근 한 발짝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발자국의 기록이 사진이고 그림입니다. "글=김진수 기자 true@hankyung.com
사진=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