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규 택 < 삼주SMC 대표 tedhan7@gmail.com >

요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신문,방송마다 그냥 더위가 아니라 '무더위'란 표현을 쓸 정도니 보통 더위가 아니다. 날씨가 워낙 무더우니 주부들의 저녁식사 준비도 보통 일이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숨막힐 지경인데 뜨거운 불 옆에서 끓이고 데우는 일을 하니 가히 더위와의 전쟁이라 할 만하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한여름에 물밥을 먹는다. 밥을 차가운 물에 말고,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보리쌀독에 넣어 말린 굴비를 찢어서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다른 반찬이 필요 없을 정도로 시원한 별미다. 먹을 때 시원하고 준비하는 데 땀 흘릴 필요가 없으니 요즘 같은 더위에 제격이다.

더위에 지친 아내 생각에 전화를 걸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아내에게 오늘 저녁은 내가 별미를 준비할 테니 저녁 준비는 나한테 맡기고 편히 쉬고 있으라고 말했다.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준비한다. 오늘의 요리는 '물밥'이다. 큰 그릇에 냉수를 담고 냉녹차를 우려낸 후 얼음을 넣는다. 녹차는 물 특유의 비린내를 없애주고 시각적으로 시원한 느낌을 준다.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보리굴비는 포기하고 북어포에 오이,배추,잘 익은 열무김치,참기름 고추장이 전부다.

음식이 소박하니 근사한 사기그릇으로 식탁의 멋을 내본다. 얼음물과 꼬들꼬들해진 밥알을 씹을 때마다 입안이 얼얼해질 정도로 시원하다. 세계를 통틀어 가공하지 않은 물만으로 요리를 만드는 경우가 없으니 물밥은 우리나라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고,여름철 땀을 많이 흘려 부족해지기 쉬운 수분을 보충해주니 건강식이다. 더위에 지친 아내를 쉴 수 있게 해 원기를 회복시켜 주니 남편의 사랑이 담긴 보양식이다.

어린 시절에는 물밥을 자주 먹었다. 여름철에는 장독대 위에 놓아 두어 딱딱해진 밥을 불려서 먹기 위해 찬물에 밥을 말았고,겨울철에는 부뚜막에서 차가워진 찬밥을 따뜻하게 먹기 위해 더운 물을 넣어서 물밥을 만들었다. 학교에서는 추운 겨울날 언 도시락을 녹여 먹으려고 난로 위 주전자의 끓는 물을 부어서 물밥을 만들어 먹었다. 가난했던 시절의 물밥도 이제는 고급 향토음식점에서나 맛볼 수 있는 별식이 되었다.

식사 후 설거지는 일도 아니다. 남은 반찬은 냉장고에 넣고,물밥 그릇은 깨끗이 헹구면 끝이다. 물밥으로 속은 서늘해지고,더운 날씨에 고생하는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덜어졌으니 오랜만에 여유로워진 아내와 손잡고 산책이라도 나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