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영 < 서강대 교수·경제학 >

1997년 봄 태국 바트화의 폭락으로 불거진 외환위기 파고가 인도네시아에 이어 말레이시아와 한국을 덮쳤다. 그런데 말레이시아는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리지 않고도 위기를 모면했는데,훨씬 펀더멘털이 단단하던 한국경제는 왜 어처구니없이 당했을까.

미국발(發) 금융위기와 함께 연일 치솟는 유가가 시시각각 우리경제의 목줄을 죄는 지금 우리가 외환위기의 쓰라린 경험으로부터 꼭 배워야 할 교훈이 하나 있다.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있어 국가신인도의 중요성이다. 한국정부가 눈앞에 다가온 위기의 실체조차 파악 못하고 허둥대고 있을 때,말레이시아는 마하티르 총리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위기를 관리할 수 있다'는 신뢰를 국제사회에 확실히 심어주었다. 이는 결국 국가신인도로 연결되고 우리나라와 달리 말레이시아는 들어온 외국자본을 현지에 묶어 놓을 수 있었다.

한국과 같이 대외교역과 외국인투자에 크게 의존하며 경제를 꾸려가고 국내증시에서 외국자본의 비중이 큰 개방형 국가에선 우리 스스로의 경제 살리기 노력에 못지않게,'우리경제에 대한 외국인의 신뢰'가 아주 중요하다.

그렇다면 요즘 국제사회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나라꼴 돌아가는 것을 보면 한때 '동방의 등불'이라고 칭송받던 한국이 '촛불의 나라'로 전락하고 있다. 온 나라가 몇 달째 쇠고기에 올인(!)하며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신뢰의 그림자조차 찾기 힘든 나라,자신들이 싫어하는 신문에 광고를 실었다고 기업을 협박하는 반기업정서가 판치는 나라,폭력시위에서 경찰버스를 수십 대나 때려 부숴도 별 탈 없는 나라.신뢰의 위기,정정(政情)의 위기,법치의 위기이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외국인이면 이런 나라에 누가 투자하겠는가.

이미 국제금융시장에서 거래되는 외평채 가산금리가 빠른 속도로 치솟고 있다. 한국정부의 위기관리능력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뉴스위크지도 이명박 정부가 불과 100일 만에 레임덕에 빠졌다고 빈정댄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 한 달간 무려 7조원이 국내증시에서 빠져나가 최장기간 순매도라는 한심한 기록을 세웠다.

앞으로의 외국인 투자유치에도 짙은 먹구름이 덮인다. 외국기업이 투자대상국을 정할 때 임금 등 경제적 요인에는 주판알을 튕기지만 정정이 불안한 나라는 아예 제외시키기 때문이다. 과거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는 온 국민이 금모으기로 똘똘 뭉쳐 이를 극복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국정혼미의 블랙박스를 열어보면 외환위기 때보다 훨씬 상황이 복잡하고 힘든 것 같다. 거의 모든 갈등의 밑바닥에 깔린 진보좌파세력과 우파정부 사이의 이념갈등과 힘겨루기,여기에 독도분쟁,꼬이는 남북대화,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노사관계 등의 악재가 겹쳐지면 이는 당연히 국가신인도의 상실로 연결되고 우리경제는 5년간 계속 표류할지도 모른다.

이 같은 최악의 사태는 막아야 한다. 한국경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선 우리사회 내부의 신뢰부터 회복해야 한다. 국민들이 자기 나라 대통령과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데 어느 외국인이 한국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을 신뢰하겠는가. 싫든 좋든,잘하든 헤매든 그래도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아닌가. 취임해서 국정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국가지도자를 이렇게 흔들어대면 외국인의 눈에 대한민국 리더십의 위기와 정부능력의 위기로 비쳐질 것이다. 당연히 이런 나라에 대한 국가신인도가 높을 리 없다.

모든 이념과 갈등을 잠시 뒤로 물리고 당장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모두 힘을 합쳐보자.그래야만 국제사회의 한국경제에 대한 신뢰가 회복돼 외국자본이 몰려오고 우리가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