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내부규정 어떻길래… 드링크제 만들며 같은 서류 3번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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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법제(法制)행정 사령탑인 이석연 법제처장이 정부 부처의 각종 내부규정에 대해 "국민과 기업의 경제활동을 가로막고 있다"며 '욕을 먹더라도' 개정하거나 폐지해야 한다고 직격탄을 쐈다. 도대체 어떤 조항들이기에 이런 지적이 나왔을까.
국내 법률 체계는 헌법을 정점으로 법률,대통령령,총리령,시행규칙,행정규칙 등으로 짜여져 있다. 6월 말 현재 우리 사회를 규율하고 있는 법률은 4300여개다. 여기에 각 행정부처의 훈령이나 예규,고시 등과 같은 내부규정 1만1275건을 포함하면 '법률 홍수'속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부처 맘대로' 규정에 깔린 시장경제
이 법제처장이 쓴소리를 내뱉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행정부처의 내부규정은 일반 법률과 달리 법제처의 심사 없이 장관이 만들어 시행하면 법률과 똑같은 효력이 발생한다.
그는 "원칙적으로 훈령이나 예규,고시는 국민의 권리나 의무에 관한 사항은 정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헌법 원리지만 내부규정 중에는 기업활동을 규제하고 개인의 권리를 규정한 것이 많다"고 말했다.
이 처장이 밝힌 행정부처들의 내부규정에 따른 규제건수는 1만1275건.하지만 이 숫자는 국무총리실 산하에 설치된 규제개혁위원회가 집계한 5240건과 큰 차이를 보인다.
국무총리실 관계자는 "법률부터 훈령까지 모든 규제들을 각 부처로부터 신고받아 집계했기 때문에 법제처의 숫자와 차이가 난다"고 설명했다. 행정부처가 알아서 '신고'하지 않으면 어떤 내부규정이 잘못됐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말이다.
◆행정만능 규제로 기업 족쇄
비타민 드링크제를 만들고 있는 A사는 식품의약품안전청에 같은 내용의 서류를 세 차례나 냈다.
의약품 성분이 음료수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점검하기 위해 식약청이 만든 내부규정(의약품제조시설에 관한 고시) 7조1항 때문이었다. 이 규정에 따르면 회사가 자발적으로 약품 성분이 음료수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조사해 증빙자료를 회사에 비치하고,식약청에 내게 돼 있다.
A사는 "생산에 앞서 제조품목을 신고하고 자체적으로 조사해 회사에 서류를 비치하는 데다 생산실적 보고 때에도 같은 내용을 식약청에 보고하는데 또 해야 하느냐"고 민원을 제기했다. 식약청은 민원제기 4년 만인 지난 14일 이 조항을 없앴다.
◆악법도 법이다?
지난 5월 S사는 서울시로부터 3개월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정보통신공사업법에 따르면 3년마다 한 번씩 한 달 안에 시ㆍ도지사에게 사업자등록 갱신 신고를 했어야 했지만,담당직원 실수로 기한을 넘겼기 때문.3개월간 회사 문을 닫게 되면 회사가 입을 손해액은 약 8000억원에 달했다.
"시정 기회도 주지 않고 영업정지를 내린 것은 너무하다"고 호소했지만 시로부터 '법은 법'이란 대답을 들었다. 결국 이 회사는 변호사를 선임,영업정지 취소 가처분신청을 내 지금 당장엔 영업정지는 면한 상태다.
법제처에 따르면 한 도시에서 신고 누락으로 영업정지 처분을 받은 IT(정보기술)업체가 40곳을 넘는 경우도 있었다. 법제처는 "당초 이 법은 2005년 부실 IT 업체 퇴출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의도에 비해 처벌이 과중하다"며 "기업들에 대한 영업정지나 허가 취소 등은 신중하게 하도록 관련법을 고치겠다"고 밝혔다.
◆기업 접대비도 제한
기업들이 사업상 사용하는 접대비와 관련한 국세청 내부 규정도 도마 위에 올랐다. 이 처장은 "접대비 범위가 조세법상 명확하지 않다"며 "경제 활성화를 위해 접대비 범위를 대폭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2004년 1월 국세청이 접대비 업무 관련 입증에 관한 고시를 개정,50만원이 넘는 접대비를 썼을 때는 계산서와 함께 상대방의 이름이나 상호 등을 밝히는 '접대비 실명제'를 도입한 것을 염두에 둔 지적이다.
기업들은 "모호한 접대비 인정 기준이 기업 활동을 위축시킨다"며 이 제도를 없애거나 한도를 100만원으로 올려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