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전거를 처음 탄 것은 여덟 살 무렵이었다. 안장에 올랐으나 중심을 못잡고 비틀거리는 자전거를 사촌 형이 뒤에서 잡아 주었다.

담대하게도 비탈길을 내려오며 자전거 타는 법을 익혔다. 물론 자전거는 몇 번 길섶으로 꼬꾸라졌다. 자전거를 타는 일이 익숙해지자 논두렁을 오가기도 했다.

자전거가 순전히 사람의 몸에 의해 구동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보다 더 어릴 적이었다. 아버지는 삼천리자전거에 나를 태워 추풍령 고갯길을 넘어 이발소에 데려갔다.

자전거 뒤에서 나는 아버지의 땀내와 가쁜 숨소리를 들었다. 그때 아버지는 아마도 지금의 내 나이쯤 되었을 것이다. 이발을 끝내고 귀밑으로 지나가는 바람을 맞으며 추풍령을 내려오던 여름날의 그 시원한 풍경은 아직도 생생하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자전거를 타고 통학했다. 8㎞ 남짓 되는 거리였다. 고등학교에는 자전거 보관소가 있었는데 어림잡아 700대의 자전거가 보관돼 있었다.

내 고향인 김천시의 자전거 타기 열풍이 언론에 소개되는 것을 얼마 전 봤다. 새삼스럽게도 나는 서른 해 전 나의 생가 봉당에 세워져 있던 삼천리자전거와,여름 땡볕 속을 굴러가며 바람을 가르던 내 청춘기의 자전거 생각이 났다.

소설가 김훈은 스스로를 자전거 레이서라고 부른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 사람의 몸은 길 위로 퍼져나가고,뒤쪽으로 물러나는 길은 몸속으로 흘러 들어온다'고 썼다.

아마도 자전거와 몸과 길의 호응적 관계를 이처럼 탁월하게 간파해낸 문장도 드물 것이다. 소설가 김훈은 또 얼마 전 유럽을 다녀왔다. 무인대여 자전거인 프랑스 파리의 '벨리브'와 독일 베를린의 '콜어바이크'를 타고 자전거 여행을 다녀왔다. 파리에는 2만여 대의 무인대여 자전거가 비치돼 있다고 한다.

알려진 바대로 네덜란드와 덴마크,독일은 자전거 천국이다. 암스테르담의 경우 자전거의 교통 분담률이 60%에 육박한다. 외신에는 올림픽 개최를 앞둔 베이징 시민들 사이에서도 이 친환경적인 자전거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올림픽을 앞두고 차량 홀짝제를 시행하자 베이징 시민들이 대거 자전거를 구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유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자 우리 정부도 공공기관 차량 홀짝제 시행에 들어갔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자전거 이용이 이들 나라만큼 큰 관심을 받고 있지는 않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법하다. 우선 자전거 보관소가 부족하다. 보관소라는 곳이 마치 버려진 소금창고 같아서 도시 미관에도 좋지 않고,심지어 이 보관소에 자전거를 세워 놓으면 자물쇠를 끊어 자전거를 훔쳐가거나 안장을 빼가는 경우도 있다.

또 도심에서 자전거를 이용하려면 인도 위 자전거 도로를 이용하거나,차도에서 차량들과 함께 달려야 하는 데 이게 여간 위험천만한 게 아니다.

차도에 자전거 도로를 별도로 설치하는 나라들이 있다는데,우리도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으면 어떨까 싶다. 가정마다 한 대 정도의 자전거가 있지만 정작 자전거가 다닐 만한 길은 마땅해 보이지 않는다.

내 집에는 지금 자전거가 없다. 한 대를 구입했으나 한 달 만에 도난당했다. 아이를 위해 새 자전거를 살 생각이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아버지는 엄복동 선수에 대해 말씀하시곤 했다.

자전거 판매상인 일미상회 점원이었던 엄복동.일제강점기에 우리 국민들이 나라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일본인 선수들을 물리치며 각종 자전거 대회를 석권했던 영웅이다. 아버지가 내게 들려준 엄복동 선수 얘기를 이제는 내 아이에게 들려줄 참이다. 내가 엄복동 선수처럼 달리고 싶었듯이 내 아이도 엄복동 선수처럼 씽씽 달리고 싶어할 것이다. 달려라,자전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