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힘이 세다. 외환위기로 나라 앞날이 풍전등화 같던 1998년 7월,박세리 선수의 US여자오픈 우승은 온 국민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었다. 양희은씨의 노래 '상록수'를 배경으로 거듭 방송된 맨발 샷 장면은 가망 없다 절망했던 이들에게 위기 탈출의 용기를 부여했다.

미국에서 그것도 골프로 우뚝 선 모습은 '서양인도 별 것 아니다,뭐든 하면 된다'는 배짱을 심었고,공부 아닌 다른 걸로도 승부할 게 많다는 새로운 사실을 일깨웠다. 그리고 10년.당시 골프를 시작한 스무살 박인비와 오지영이 US여자오픈과 LPGA 스테이트 팜 클래식에서 각기 우승했다.

그 무렵 골프에 입문한 사람이라면 다들 박 선수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당시 10살이던 88년생 용띠 여자 골퍼들은 특히 더했던 모양이다. 한꺼번에 많은 수가 뛰어드는 바람에 일찍부터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박세리 키즈'다. 얼마나 많은지 US여자오픈 42위 안에 든 한국선수 15명 중 8명이 박세리 키즈라는 마당이다.

88년생은 아니지만 이선화 지은희 등도 박세리 키즈의 범주에 속한다. 꿈 꿔야 이뤄진다지만 막연한 상태에선 꿈조차 갖기 어렵다. 실체가 보여야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뛰어들 수 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에 도전해 보란 듯이 성공한 이들이 추종자를 만들어내는 건 그런 까닭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조기 유학따윈 생각도 못하는 이땅 토박이들에게 안겨준 가능성,강영우 박사가 장애인들에게 던진 자신감의 무게는 세상 척도로 잴 수 없다. 칼리 피오리나가 여성들에게 가져다준 CEO의 꿈,미식축구 선수 하인스 워드가 혼혈아들에게 퍼준 포부의 크기는 무한대에 가깝다.

박 선수의 성적은 전같지 않다. 선배는 길을 내고 후배는 걷는다. 영원한 스타는 없다. 그래도 박세리가 있어 박세리 키즈가 있다. 어눌한 발음에 주눅들지 않고 영어공부에 매달리며 세계 진출을 꿈꾸는 반기문 키즈 또한 곧 제2 제3의 반기문이 돼 지구촌을 누빌 것이다. 스타와 영웅을 기리고 존중하는 이유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