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 < 문학·영화평론가 >

독일의 문예비평가인 발터 벤야민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열차에서 추리소설을 읽는 여행자는 여행의 불안을 이야기의 불안으로 억압한다"라고 말이다. 여행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함은 긴장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처음 가 보는 여행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긴장은 여행의 즐거움중 하나다. 하지만 모른다는 것은 언제나 불편을 동반한다. 발터 벤야민은 사람들이 일부러 긴장된 소설을 읽는 이유를 진짜 긴장으로부터의 도피로 보았다.

생각해보면 발터 벤야민의 말은 꼭 여행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할 수 있다면 앞날에 놓인 개인의 운명만큼이나 알 수 없는 것도 없다. 사람들은 내일을 예측하고 계획하지만 한편으로는 의외의 사건 앞에 놀라곤 한다. 예측대로 되는 일도 있지만 예상을 벗어난 놀라운 일도 많다. 사람들은 사필귀정과 같은 말을 믿고 싶어 한다. 이 말 속에는 옳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를 얻으리라는 낙관적 기대가 숨어 있다. 하지만 사는 것은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옳은 일을 해도 나쁜 결과를 맞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히려 인생의 비밀은 새옹지마와 같은 격언에 더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듯싶다.

내일,내년 그리고 먼 훗날 일어날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인생은 재미있기도 하고 공포스럽기도 하다. 여행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초가 되면 토정비결을 보고 곤란한 지경을 맞을 때 별자리나 사주를 점쳐본다. 서양이나 동양을 막론하고 점성술에는 인생에 숨겨진 행로가 있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다.

어느 시기가 되면 지금의 고난이 끝나고 언제쯤이면 기다렸던 무엇이 출현할지 사람들은 점성술에 묻는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점성술은 사람들이 생의 불가해함에 대해 얼마나 답답해했는지 잘 보여준다. 점성술에는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꽃이 지는 대자연의 순리,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자연의 법칙처럼 우리의 삶도 유순한 법칙 안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숨어 있다.

단순한 사람들이 인생의 행로를 점성술에서 찾는다면 불가해함이 인생임을 아는 사람들은 예술을 접한다. 예술은 예측 불가능한 인생 자체가 살아가는 맛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매일 독약을 조금씩 먹어 면역성을 길렀다는 미트리다테스 왕이 독서의 효능에 비유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독을 조금씩 먹어 면역을 기르듯 책은 세상의 독에 면역을 제공한다. 뜻대로 되지 않고 노력한 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이 비단 나만의 불행이 아님을 수많은 예술작품들은 보여 준다. 예술의 가장 큰 소용이 있다면 바로 이 겸손한 위로에 있을 것이다.

물론 생애의 불가해함을 훌쩍 뛰어 넘는 사람도 있다. 아니 그들은 성인이라 불리며 이미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 다른 곳으로 건너간 자들이다. 초월자라고 부르는 성인들은 우리가 힘겨워하는 불가해함과 예측 불가능성을 받아들인 자이다.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 부른 석가모니나 더 깊은 용서가 세상을 구원한다고 말한 그리스도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에 아파하고 욕망에 허덕이는 평범한 속인들이기에 그들의 말을 경전으로 읽지만 쉽게 행하지는 못한다. 소설이나 시,문학,영화와 예술이 속인들의 위안인 까닭일 것이다.

성인들의 말씀은 가르침을 주지만 예술은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너도,나도 이 비루한 세상에서의 여행을 견디는 그저 그런 범인들이라고,예술은 지상의 언어로 속삭인다. 이 언어를 통해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이라는 여행은 죽음의 필연성과 삶의 일회성이라는 명제 앞에 유순해진다. 인생의 행로를 견디게 하는 예술의 가치는 2할의 깨달음과 8할의 위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