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엘리트 외국계 출신들로 '파워시프트'

올해 가장 파격적인 금융권 인사로 기록될 민유성 산업은행장과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 내정자는 1980년대 초 각각 씨티와 뱅커스트러스트(BTC) 등을 통해 사회에 첫 발을 디딘 외국계 금융회사 출신 1세대 인물이다. 금융권의 최고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전광우 초대 금융위원장도 외국계 금융회사에 근무하지는 않았지만 세계은행(IBRD) 수석연구원과 메릴린치 등 주요 투자은행의 자문역을 역임,사실상 해외파 인물로 분류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특유의 실용적 인사 원칙과 맞물리면서 외국계 출신들이 대거 기용된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관치금융이 해체되면서 국내 금융회사로 대거 이직,영향력을 키워온 이들은 관료 출신의 퇴조와 맞물리면서 새로원 금융권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씨티ㆍBTC,양대 인맥 형성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외국계 은행 중 국내에 가장 먼저 진출한 씨티와 BTC는 비슷한 시기에 국내에 들어온 체이스맨해튼과 더불어 외국계 출신들의 계보를 잇는 인맥들을 형성해왔다.

씨티의 경우 장형덕 비씨카드 사장의 1976년 입행을 시작으로 인맥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후 강정원 국민은행장,하영구 현 씨티은행장,민유성 산업은행장,황성호 PCA자산운용 사장 등이 1978년과 79년을 전후로 씨티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들은 모두 씨티가 첫 직장이어서 각별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씨티은행 출신 금융인 모임을 뜻하는 '씨금회'를 만들어 두 달에 한 번씩 모이면서 씨티 출신 인맥들과의 결속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국민은행의 경우 강 행장을 비롯 최영한ㆍ원효성 부행장,이원기 KB자산운용 사장 등 외국계 출신들이 핵심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장 사장은 "씨티 출신의 강점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몸소 체험하면서 확고하게 체질화돼 있다는 점"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씨티와 달리 BTC는 초대 대표를 지낸 최동훈 사장이 철저한 도제식 훈련을 통해 인맥을 키워왔다. 1980년대 초반 씨티에서 BTC로 자리를 옮긴 강정원 국민은행장과 황영기 회장 내정자는 이 기간 BTC 서울지점에서 6년간 같이 일했다. 당시 강 행장은 부지점장 겸 기업금융 대표였고 황 내정자는 담당 부장이었다. 임기영 IBK증권 사장도 당시 함께 근무했다. 강 행장이 관리형으로 내실을 다지는 스타일이었다면 황 내정자는 공격적인 영업으로 뛰어난 실적을 올렸다. BTC출신 인사는 "당시 두 사람 간의 팀워크가 절묘해 BTC 출신들에 대한 평판이 높아졌다"면서 "그 덕분에 현재 금융회사 대표직을 맡는 사람만 10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1998년 BTC가 도이치뱅크에 인수되면서 국내 지점 간 인력도 통합돼 이후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BTC 출신 인사들은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결속력을 이어가고 있다.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현직에 있는 BTC 출신 50여명이 모두 모이는 파티도 매년 열린다. 한 금융권 인사는 "BTC의 경우 초기 선발 당시부터 일류만 모인다는 의식이 있었고 다소 폐쇄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선후배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증권업계도 외국계 IB출신 두각

증권업계에서도 씨티은행과 BTC 출신들이 핵심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이 가운데 현직 1세대 인물은 김성태 대우증권 사장.씨티에서 8년 근무한 뒤 BTC로 스카우트돼 14년을 근무했다.

이찬근 하나IB증권 사장,이원기 KB자산운용 사장,임기영 IBK투자증권 사장,호바트 엡스타인(한국명 이병호) KTB투자증권 사장,리토 카마초 크레디트스위스(CS) 아ㆍ태 부회장,박장호 씨티글로벌마켓증권 대표,신동기 노무라증권 전무,이건표 대우증권 전무,오우택 한국투자증권 리스크관리본부장,손석우 한국투자증권 자산운용본부장,한정철 우리투자증권 트레이딩본부장 등 막강 멤버를 자랑한다.

씨티 출신으로는 김기범 메리츠증권 사장,조재민 마이다스에셋자산운용 사장,이재우 보고펀드 대표,황성호 PCA자산운용 사장 등이 눈에 띈다. 김성태 사장은 외국계 출신들이 몸값이 높아지는 이유에 대해 "원칙을 중시하는 트레이닝을 확실히 받은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는 "미국식 금융시스템이 글로벌 기준이 되면서 이를 먼저 체계적으로 습득한 인력들이 자본시장이 커지고 있는 국내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며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을 앞두고 파생상품 등에 대한 이해와 실무 경험이 있다는 것도 경쟁력을 갖는 요인"이라고 해석했다. 최근에는 먼저 자리를 잡은 1세대들이 후배들을 끌어주면서 외국계 IB 출신들의 저변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

임기영 IBK증권 사장은 "그동안 국내 금융회사들의 경우 관치와 규제로 인해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면서 "반면 해외파들의 경우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국제감각과 풍부한 인적 네트워크,다양한 실무경험을 인정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심기/김재후/김현석/정인설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