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수 <CJ제일제당 사장 jinsoo@cj.net>

일전에 김훈의 역사소설 '남한산성'을 읽었다. 병자호란때 청나라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도피해 들어간 조선 임금과 신하들의 이야기다. 40여일 넘게 버티다 결국 항복하는 과정을 그린 것인데,그 안에 있는 힘없고 초라한 조정이 바로 벽 속에 갇혀버린 인간의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애당초 싸울 힘도 용기도 없어 백성을 모두 적군의 손에 남겨두고 왕과 일부 고관들만 숨어들어간 것인데,남한산성이란 벽 속에서는 자기들끼리 심각하게 논쟁을 하고 궁리를 찾지만 밖에서 보면 종말이 뻔한 한심한 노릇이었다.

벽 속에서 힘겨루기 하는 집단은 벽 밖의 열린 공간에서 경쟁하는데 익숙한 다른 인간 집단에게 통째로 먹히게 돼 있다. 벽 속에서 나오려 하지 않고,겁날수록 벽을 더 높이 쌓는 사람들에게는 보편적인 특징이 있다.

우선 새로 만들고 개척하기보다는 지키려는데 급급한 정신구조를 갖고 있다. 몸집을 키우는 것도 자신의 실력으로 하기보다는 기회를 봐가며 남이 쌓아놓은 공을 빼앗는 경우가 많고 남이 한 것을 비판하기 좋아한다. 또한 게으르고 비굴한 면이 많아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특징이 있다. 특히 '내'가 아닌 '우리'란 따뜻해 보이는 말 속에 묻어서 익명성을 즐기며 항상 편한 곳을 찾는다.

벽을 순 우리말로 바꿔 말하면 울타리이고,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우리'라고 한다. 울타리는 좋은 의미로 쓰이지만 '의지할 데'란 뜻이 가장 보편적이다. 의지할 곳에 있는 '나'는 약해지기 십상이다. 따라서 벽 허물기의 첫 단계는 '강한 나'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한 집단의 일원이라서 자랑스러운 내가 아닌,강해지고자 하는 나와 나의 동료들이 모여있는 곳이기에 유망하다라고 생각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가 오래된 기업일수록 울타리 속에 갇혀 있기가 쉽다. 이제까지 늘 그랬듯이 우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러한 울타리 속의 작은 울타리부터 깨버려야 한다. '우리'란 의식속에 갇혀 있지 말고,울타리가 주는 막연한 의존심을 버리고,울타리를 스스로 깨고 나오지 않으면 밖의 힘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세계화는 이미 현실로 다가와 있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는 단위는 '우리'가 아닌 경쟁력 있는 '나'다. 내가 경쟁력이 있으면 큰 기회가 될 것이고,울타리 속에 안주한 채 역량 없는 내가 되면 울타리 자체가 망하거나 울타리에서 나보고 나가달라고 할 것이다. 벽 허물기는 우리의 문제이기 이전에 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