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내 삶에 대한 물음이다. 그래서 소설을 쓴다. "

31일 폐암으로 타계한 소설가 이청준씨는 《당신들의 천국》《병신과 머저리》《서편제》 등 여러 작품을 통해 한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39년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난 고인은 "글장이가 된 과정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가 시골 태생으로 자라온 내력을 든다"고 말하곤 했다.

산 속 바위 밑 동굴 안에 어떤 짐승이 살고 있는지 알기 위해 입구에 불을 지펴보고,분묘를 이장하는 광경을 발견하고 백골을 구경하기 위해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갔던 어린 시절 호기심이 소설가 인생의 밑거름이 됐다는 설명이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교회 성탄절 행사에서 소설 한 편을 접한 후 집 서가에 꽂힌 책들을 읽으면서 소설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가 등단한 때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인 1965년.단편소설 〈퇴원〉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으면서다. 1967년 《병신과 머저리》로 동인문학상을,1969년 《매잡이》로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신인상을 각각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40여년 동안 꾸준히 고른 수준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토록 많은 작품을 썼는데도 태작이 거의 없는 것이 놀랍다고 후배 문인들은 평가한다. 작품 주제도 토속신앙에서부터 인간소외,지식인의 고뇌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문단의 평가만큼 대중의 호응도 높았다. 《당신들의 천국》과 《낮은 데로 임하소서》는 100쇄를 돌파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그는 생전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거의 모든 소설은 나의 삶과 타자,혹은 사회와의 불화-화해의 단계를 담고 있는 이야기 형식"이라고 말했다.

대표작《당신들의 천국》의 결혼식장에서 주례의 축사를 빌려 "나와 타자,한 세계와 다른 세계 간의 불신ㆍ불화 관계를 조화롭게 풀어 감싸 나가는 건 가족이나 혈연,지연 관계 이상의 보편적 사랑의 덕목"이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등단작 〈퇴원〉을 비롯해 《병신과 머저리》 《축제》 《소문의 벽》《낮은 데로 임하소서》 등 10여편의 배경 및 소재가 의료와 관련돼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이에 대해 고인은 "어떤 병증과 진료 과정을 빌려 우리 사회의 일반적 병리 현상이나 정치적 억압상을 드러내려는 아이러니나 알레고리의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해 폐암 선고를 받고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소설집《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를 발표하는 등 문학을 향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고인의 작품은 영화와 인연이 깊었다. 1972년 영화화된《석화촌》은 청룡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1993년에는 임권택 감독이 《서편제》를 영화로 만들어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을 거머쥐었다. 임 감독은 이후 고인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영화 《축제》와 《천년학》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창동 감독도 그의 《벌레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 《밀양》을 발표,주연을 맡은 배우 전도연씨가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빈소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14호실.장례식은 문인장으로 치러진다. 2일 오전 7시 영결식에 이어 오후 2시에는 장지인 전남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 갯나들에서 노제를 지낸다. 김병익 문학과지성사 자문위원이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남경자씨와 외동딸 은지씨가 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