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2년 전 봄이다. 장선우 감독의 '꽃잎'을 내 첫사랑 소녀와 함께 보러 갔다. '꽃잎'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영화였기에 데이트 영화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 이정현이 시골의 나무 아래에서 김추자의 '꽃잎'을 가벼운 춤과 함께 부르는 첫 장면은 우리 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극장을 나온 우리는 '꽃잎'을 계속 흥얼거렸다. 그 첫사랑 소녀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던지.

그리고 현재,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곳에'를 보며 12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순수한 모습의 수애가 두 눈을 감고 시골 아낙들 앞에서 김추자의 '늦기 전에'를 부르는 장면이 시작되면서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잠시나마 옛 추억에 잠겼다. 12년 전과는 달리 어두운 극장에서 홀로 나왔다는 것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20대 중반의 사랑을 떠올릴 수 있었기에 이준익 감독에게 감사한다.

아마 대중문화가 주는 가장 큰 매력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네 인생사를 가장 쉽고,친근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유행가 가사가 모두 자신의 이야기같고,멜로 영화나 드라마는 자신의 연애담같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주변에서 흔히 보거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님에도 유난히 그 여운의 자락이 길다. 광대와 왕의 묘한 사랑 이야기 '왕의 남자',1980년대의 한물간 스타와 매니저를 다룬 '라디오 스타',40대 가장들의 밴드 이야기 '즐거운 인생',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남편을 찾아가는 아내를 다룬 '님은 먼곳에' 등이 흔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묘하게 내 인생사 같다는 느낌이 들고,영화의 울림이 계속된다. 아마 울림의 저변에는 삶에 대한 '진정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국영화를 소개하면서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 영화가 '라디오 스타'일 것이다.

연출자인 이준익 감독과 안성기,박중훈 등의 배우들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의 삶이 그대로 영화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이준익 감독은 "큰 고민 안 해,빨리 빨리 찍어야지,나는 '레디 고,컷'만 외치고,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다해"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공을 돌린다. 하지만 촬영 전 콘티 작업을 완벽하게 한다. 촬영 전에 충분한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촬영 현장은 항상 화기애애하고 정감이 넘친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에선 '사람'이 보인다. '님은 먼곳에'의 엔딩이 대표적이다. 베트남까지 찾아온 순이(수애)와 무릎 꿇고 사과하는 상길(엄태웅),그리고 카메라 바깥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는 정만(정진영)을 통해 관객들은 각자 수많은 이야기와 느낌을 가지게 된다. 순이와 상길이 아무 말 없이 흐느끼는 모습은 무엇을 느끼건 결국 우리네 인생살이다.

이런 장면은 감독과 배우,스태프가 제대로 소통하지 않으면 나오기 힘들고,그 정점에는 감독이 서 있다. '영화는 감독의 마음을 닮는다'는 말이 있다. 그의 영화가 진정성을 담는 이유는 영화와 사람과 삶을 사랑하는 진정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원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