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소공동 삼화빌딩 9층에 있는 김기탁 삼화제지 명예회장(88)의 사무실은 마치 박물관 같았다.

무역선을 타기 위해 1948년 발급받은 여권이 액자에 담겨 있었고,엽연초 수입업자와 함께 1976년 미국 하와이에서 찍은 흑백 사진도 걸려 있었다.

"홍콩에서 무역을 했던 친구들은 거의 다 세상을 떠났어.나만 남았지…."

김 회장은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 등과 함께 해방 이후 홍콩 상하이 등을 누볐던 '무역 1세대'다.

꼭 60년 전인 1948년 당시 28세의 나이로 '삼화무역공사'를 설립하면서 그의 60년 무역 인생은 시작된다.


"해방은 됐지만 삶은 비참했어.먹을 것도 없었고 좌우대립으로 세상이 시끄러웠지.하루는 상하이에서 남일선이라는 교포가 화물을 싣고 인천항에 처음으로 들어왔다는 거야."

상하이 교포 남씨가 가져온 화물은 양복지 신문용지 페니실린 등 처음 보는 물건들이었다. 김 회장이 무역선을 타기로 결심한 것도 그 무렵이다. 그 해 10월 그는 마른 오징어를 싣고 화물선에 올랐다.

닷새 만에 도착한 홍콩항은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 각국의 무역인이 모여 들었던 호텔 '육국반점'에서 오징어 2000t을 넘기고 첫 수출대금을 손에 쥔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김 회장과 함께 화물선을 탔던 무역 1세대 중에는 '화신'의 박흥식씨,'건설실업'의 김익균씨(납북)도 있었다. 이들이 수출한 물건은 오징어를 비롯 계란 한천(우뭇가사리로 만든 공업제품) 아연 텅스텐 등이었다. 당시 무역선은 부정기선이었고 인천을 출발해 홍콩에 도착하기까지 대만 상하이 등을 경유하는 일도 잦아 계란의 절반이 상해 버린 적도 있었다.

김 회장은 6·25전쟁 이후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1960년대에는 독일로 엽연초를 수출하면서 상당한 돈을 벌었다. 이후 창동제지를 인수,1970년대부터는 해외로 고급 종이를 수출하는 데 주력했다. 아들이 경영하는 현 삼화제지는 지금도 일본에 최고급 종이를 수출하고 있다.

무역협회 창립 멤버이기도 한 그는 1971년부터 14년 동안 무역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그래서인지 기업인들이 존경받는 분위기가 여전히 아쉽다고 했다. "경제인들이 존경받는 나라가 진정 부강한 나라인데 아직 그렇지 못한 것 같아.기업인들을 격려하고 의욕을 북돋워주는 사회가 돼야 할텐데…."

그는 요즘도 매일 사무실로 출근해 신문을 읽고 지인들을 만난다. 격주로 충북 청원에 있는 공장에 들러 직원들과 함께 식사도 한다. 미수(米壽)를 맞은 김 회장은 오는 가을 60년 무역인생을 담은 자서전을 출간한다.

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