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60년…도전의 순간들] (3) 1959년 금성사 라디오 '금성 A-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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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없어 못 만든다고? 외국가서라도 배워 와"
1958년 4월,구인회 LG그룹 창업 회장은 락희화학(현 LG화학) 임원들을 모아놓고 오랫동안 벼르던 이야기를 쏟아냈다.
윤욱현 당시 락희화학 기획실장이 제출한 전자기기 생산공장 건립안에 대해 임원들이 "기술수준이 낮아서 힘들다"는 의견을 내놓자 "기술이 없으면 외국 가서 배워오고,그래도 안 되면 외국 기술자 초빙하면 될 거 아니냐"고 일갈했다. 한국의 전자산업이 태동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전자산업의 '효시',금성 라디오
국내 최초의 국산 라디오 '금성 A-501'은 1959년 11월15일 출시됐다. 그 해 생산량은 87대,가격은 2만환이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한 금성사 직원이 월급(6000환) 석 달치 이상을 모아야 손에 쥘 수 있는 '고가품'이었지만,그나마 수입 라디오 가격의 3분의 2 수준에 불과한 '가격 파괴' 상품이기도 했다.
1958년 금성사(현 LG전자)가 설립된 뒤 제품이 나오기까지 걸린 기간은 1년.주요 부품의 국산화를 병행한 것 치고는 개발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금성사가 부품 국산화를 결심한 것은 애국심 때문이 아니었다. 수입 부품은 워낙 비쌌고,결제를 위한 외화를 구하기도 힘들어서였다.
첫 제품인 '금성 A-501'은 섀시,트랜스,너트,코드 등 60% 이상의 부품을 자체적으로 만들고 진공관과 스피커 등 일부 핵심 부품만 외국에서 들여왔다.
LG전자 관계자는 "창업 초기에 국산 부품을 생산한 덕에 후속 상품을 쉽게 개발할 수 있었다"며 "당시 수입 부품을 썼더라면 지금의 LG전자는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금성사는 1960년 3월 선풍기 'D-301'을,1961년 7월 자동전화기 '금성 1호'를 잇달아 내놓았다. '최초의 국산'이라는 꼬리표를 단 제품들이다.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
속속 국산 전자제품을 내놨지만 매출은 신통치 않았다. 전력 사정이 나빴던 데다 전자제품을 살 만큼 여유가 있는 소비자들이 드물었던 탓이다. 부유층들은 밀수를 통해 들어온 일본과 미국산 제품만 찾았다. "국산은 품질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 금성사의 초기 제품은 접촉 상태가 나빠 소리가 끊기는 일이 잦았다. 케이스의 색깔도 햇볕을 받으면 누렇게 변색됐다. 1961년까지 금성사가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자 "락희화학이 플라스틱으로 번 돈을 금성사가 다 까먹는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위기에 빠진 금성사를 살린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1961년 9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그는 예고 없이 금성사의 부산 연지동 공장을 찾았다. 공장의 임원들이 자리를 비운 상황이어서 당시 라디오 설계 책임자였던 김해수 과장이 박 대통령을 맞았다.
박 대통령이 "어떻게 하면 한국의 전자산업이 살아날 수 있겠냐"고 묻자 김 과장은 "일제 밀수품과 미제 면세품의 유통을 막아야 전자산업이 살아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방문 후 일주일.'밀수품 근절에 관한 포고령'과 함께 '전국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시작됐다. 금성사는 벌떡 일어섰다. 연 1만대에 못 미쳤던 라디오 판매량이 1962년 13만7000대까지 늘어났다.
자금이 돌면서 1965년 냉장고,1965년 전기밥솥,1966년 흑백TV,1968년 에어컨,1969년 세탁기 등을 잇따라 선보였다. 특히 국내 최초 흑백TV 'VD-191'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쌀 27가마를 살 수 있는 6만원대의 가격에도 불구,사겠다는 사람들이 많아 공개추첨을 통해 판매자를 결정했다.
◆1977년 전자제품 11억달러 수출
금성사의 경쟁사가 출현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전기 케이블을 만들던 대한전선이 1967년 전자산업에 진출,이듬해부터 냉장고 에어컨 라디오 흑백 TV를 출시하며 금성사를 바짝 추격했다.
삼성전자가 가전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69년이다. 삼성전자가 가세한 뒤 한국의 전자산업은 TV시장을 중심으로 도약의 시기를 맞는다. 이 회사가 TV시장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75년 8월 '이코노(Econo) TV'를 생산하면서부터다. 당시 출시된 TV들은 20초 정도 예열을 해야 TV가 켜졌는데 '이코노 TV'는 이를 5초로 줄였다.
1962년 11월 금성사가 미국의 아이젠버그사에 라디오 62대를 판매하며 시작된 전자제품의 수출은 1970년대부터 급속도로 늘어났다. 한국의 수출이 100억달러를 돌파한 1977년 전자제품의 수출비중은 11%에 달했다. 금성사와 삼성전자는 각각 1978년과 1979년 수출 1억달러를 넘어섰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한국을 최혜국으로 대우해 일본보다 관세를 낮게 책정하면서 수출이 활성화됐다"며 "미국의 중산층 이하 계층이 한국산 제품들을 쓰기 시작하면서 전자산업 강국의 기틀이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한국 먹여살리는 기간산업으로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전자산업은 국가 기간산업으로 자리를 굳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반도체ㆍ전자부품과 영상ㆍ음향ㆍ통신기기의 GDP(국내총생산) 기여도는 각각 19.4%와 12.0%다. 두 산업을 합하면 31.4%에 달한다. 주력 품목이 TV와 가전제품에서 반도체,휴대폰,LCD 패널 등으로 넓어진 것이 2000년 이후 국내 전자산업의 특징이다.
국내 전자업체들의 성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매년 매출이 10%가량 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연결기준으로 1034억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며 '글로벌 톱3'로 발돋움 했다. 세계 전자업계에서 1000억달러의 벽을 넘어선 기업은 삼성전자,지멘스,HP 등 3곳뿐이다.
LG전자도 에어컨 등 세계 1위 품목을 바탕으로 지난해 40조85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
1958년 4월,구인회 LG그룹 창업 회장은 락희화학(현 LG화학) 임원들을 모아놓고 오랫동안 벼르던 이야기를 쏟아냈다.
윤욱현 당시 락희화학 기획실장이 제출한 전자기기 생산공장 건립안에 대해 임원들이 "기술수준이 낮아서 힘들다"는 의견을 내놓자 "기술이 없으면 외국 가서 배워오고,그래도 안 되면 외국 기술자 초빙하면 될 거 아니냐"고 일갈했다. 한국의 전자산업이 태동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전자산업의 '효시',금성 라디오
국내 최초의 국산 라디오 '금성 A-501'은 1959년 11월15일 출시됐다. 그 해 생산량은 87대,가격은 2만환이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한 금성사 직원이 월급(6000환) 석 달치 이상을 모아야 손에 쥘 수 있는 '고가품'이었지만,그나마 수입 라디오 가격의 3분의 2 수준에 불과한 '가격 파괴' 상품이기도 했다.
1958년 금성사(현 LG전자)가 설립된 뒤 제품이 나오기까지 걸린 기간은 1년.주요 부품의 국산화를 병행한 것 치고는 개발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금성사가 부품 국산화를 결심한 것은 애국심 때문이 아니었다. 수입 부품은 워낙 비쌌고,결제를 위한 외화를 구하기도 힘들어서였다.
첫 제품인 '금성 A-501'은 섀시,트랜스,너트,코드 등 60% 이상의 부품을 자체적으로 만들고 진공관과 스피커 등 일부 핵심 부품만 외국에서 들여왔다.
LG전자 관계자는 "창업 초기에 국산 부품을 생산한 덕에 후속 상품을 쉽게 개발할 수 있었다"며 "당시 수입 부품을 썼더라면 지금의 LG전자는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금성사는 1960년 3월 선풍기 'D-301'을,1961년 7월 자동전화기 '금성 1호'를 잇달아 내놓았다. '최초의 국산'이라는 꼬리표를 단 제품들이다.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
속속 국산 전자제품을 내놨지만 매출은 신통치 않았다. 전력 사정이 나빴던 데다 전자제품을 살 만큼 여유가 있는 소비자들이 드물었던 탓이다. 부유층들은 밀수를 통해 들어온 일본과 미국산 제품만 찾았다. "국산은 품질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 금성사의 초기 제품은 접촉 상태가 나빠 소리가 끊기는 일이 잦았다. 케이스의 색깔도 햇볕을 받으면 누렇게 변색됐다. 1961년까지 금성사가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자 "락희화학이 플라스틱으로 번 돈을 금성사가 다 까먹는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위기에 빠진 금성사를 살린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1961년 9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그는 예고 없이 금성사의 부산 연지동 공장을 찾았다. 공장의 임원들이 자리를 비운 상황이어서 당시 라디오 설계 책임자였던 김해수 과장이 박 대통령을 맞았다.
박 대통령이 "어떻게 하면 한국의 전자산업이 살아날 수 있겠냐"고 묻자 김 과장은 "일제 밀수품과 미제 면세품의 유통을 막아야 전자산업이 살아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방문 후 일주일.'밀수품 근절에 관한 포고령'과 함께 '전국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시작됐다. 금성사는 벌떡 일어섰다. 연 1만대에 못 미쳤던 라디오 판매량이 1962년 13만7000대까지 늘어났다.
자금이 돌면서 1965년 냉장고,1965년 전기밥솥,1966년 흑백TV,1968년 에어컨,1969년 세탁기 등을 잇따라 선보였다. 특히 국내 최초 흑백TV 'VD-191'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쌀 27가마를 살 수 있는 6만원대의 가격에도 불구,사겠다는 사람들이 많아 공개추첨을 통해 판매자를 결정했다.
◆1977년 전자제품 11억달러 수출
금성사의 경쟁사가 출현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전기 케이블을 만들던 대한전선이 1967년 전자산업에 진출,이듬해부터 냉장고 에어컨 라디오 흑백 TV를 출시하며 금성사를 바짝 추격했다.
삼성전자가 가전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69년이다. 삼성전자가 가세한 뒤 한국의 전자산업은 TV시장을 중심으로 도약의 시기를 맞는다. 이 회사가 TV시장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75년 8월 '이코노(Econo) TV'를 생산하면서부터다. 당시 출시된 TV들은 20초 정도 예열을 해야 TV가 켜졌는데 '이코노 TV'는 이를 5초로 줄였다.
1962년 11월 금성사가 미국의 아이젠버그사에 라디오 62대를 판매하며 시작된 전자제품의 수출은 1970년대부터 급속도로 늘어났다. 한국의 수출이 100억달러를 돌파한 1977년 전자제품의 수출비중은 11%에 달했다. 금성사와 삼성전자는 각각 1978년과 1979년 수출 1억달러를 넘어섰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한국을 최혜국으로 대우해 일본보다 관세를 낮게 책정하면서 수출이 활성화됐다"며 "미국의 중산층 이하 계층이 한국산 제품들을 쓰기 시작하면서 전자산업 강국의 기틀이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한국 먹여살리는 기간산업으로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전자산업은 국가 기간산업으로 자리를 굳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반도체ㆍ전자부품과 영상ㆍ음향ㆍ통신기기의 GDP(국내총생산) 기여도는 각각 19.4%와 12.0%다. 두 산업을 합하면 31.4%에 달한다. 주력 품목이 TV와 가전제품에서 반도체,휴대폰,LCD 패널 등으로 넓어진 것이 2000년 이후 국내 전자산업의 특징이다.
국내 전자업체들의 성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매년 매출이 10%가량 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연결기준으로 1034억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며 '글로벌 톱3'로 발돋움 했다. 세계 전자업계에서 1000억달러의 벽을 넘어선 기업은 삼성전자,지멘스,HP 등 3곳뿐이다.
LG전자도 에어컨 등 세계 1위 품목을 바탕으로 지난해 40조85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