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일 < 서강대 경제대학원장 >

국내 노사전문가들과 함께 스페인의 노사관계를 둘러보고 왔다. 노사관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스페인 같은 나라에서 배울 게 뭐가 있다고 거길 다녀왔냐고 할지 모른다. 그렇다. 스페인은 한국과 함께 OECD 국가 중 노사관계 경쟁력이 바닥권에 있는 나라다. 파업은 유럽연합 평균보다 4배나 높으며 전체 고용 중 임시직의 비중이 33%를 넘어 세계 최고다. 그렇지만 이 나라와 우리를 비교해 보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노사관계의 발전을 위해 의미있는 일이다.

스페인도 우리의 한국노총,민주노총처럼 두 개의 노동단체가 있다. 스페인의 민주노총격인 CCOO 간부와의 대화 중 인상적이었던 몇 가지.도대체 왜 이렇게 임시직 비중이 높으냐는 질문에 "정규직 해고가 어렵게 돼 있어 임시직을 많이 쓰기 때문"이라고 명쾌하게 대답한다. 사용자의 인건비 절감,또는 쓰고 버리는 신자유주의 노동전략 등 비난성 대답을 예상했던 것과 반대로 정규직의 고용경직성을 원인으로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러면 임시직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냐는 질문에 "훈련을 통해 임시직의 생산성을 높여 정규직으로 뽑히게 하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법으로 강제하기를 주장하는 우리 노동계와 너무 달랐다. 금년 초 스페인도 우리 화물연대처럼 화물차 기사들이 파업을 벌였다. 이에 대한 노동단체의 의견을 물어보니 뜻밖에도 노동자가 아닌 자영업자들의 집단행동일 뿐 자기네와 상관없다고 선을 분명히 긋는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똑같은 자영업자 조직인데 노동조합으로 행세하고 노동권을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과 대화하면서 떠오르는 단어는 '최소한의 합리성'이었다. 스페인처럼 노사관계가 좋지 않은 나라에서도 최소한의 합리성은 존재하고 있었다. 임시직을 많이 쓰는 까닭은 정규직을 내보내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상식적 판단에 이의가 없었다. 게다가 피고용자와 자영자를 명확히 구분하는 분별력도 있었다. 배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나라에서도 배울 것은 있었다. 우리에겐 아직 이 정도의 합리성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 노사관계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합리성의 확보라는 데 전문가들은 동의한다. 그간 노사관계가 이성보다는 감성에 지배된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노사관계의 합리화는 경영자,노동조합,정부 등 당사자들이 불합리한 요구나 행동을 멈추는 데서 시작된다. 노동조합은 백해무익이므로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합리적 사고라 할 수 없다. 반면 노사는 대등하므로 모든 의사결정에 있어 노사가 동등하게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합리적이라 할 수 없다. 지휘명령이라는 고용관계의 본질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사갈등은 강제로라도 조정해야 한다고 정부가 생각하는 것도 불합리한 사고다. 노사갈등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고 상호 노력으로 해결되면 오히려 더 좋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기업 개혁을 예로 든다면 기업 통합이나 축소는 경영의사결정으로 설사 그로 인해 고용이 영향을 받는다 하더라도 노사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 다만 결과적으로 일어나는 고용조정에 대해서 노사가 해결방안을 협의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10년 전 모 공기업에서는 노사가 구조조정 자체는 받아들이되 적정한 퇴직절차에 대해 서로 협의했다. 그리고 이들을 일시에 퇴직시키지 않고 약 1년여 시간을 두고 우선 가능한 사람부터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알선해 내보냈다. 나머지는 전직훈련을 실시해 기술을 취득하게 한 후 재취업시켰다. 이 과정을 통해 회사의 노사관계는 신뢰가 쌓여 오히려 더 좋아졌다. 합리적으로 접근하면 구조조정이 노사관계를 개선할 수도 있는 좋은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