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60년…도전의 순간들] (5) 1973년 첫 쇳물 뽑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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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되면 빠져죽자" 돈도 기술도 없이 제철강국 신화 일궈
1973년 6월9일 오전 7시30분.포항제철소 제1고로가 내려다볼 수 있게 설계된 '제2주상(柱上)'에 임직원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숨죽여 용광로를 응시했다. "펑!" 굉음이 터졌다. 출선구를 뚫고 나온 오렌지색 섬광이 공장 지붕으로 치솟았다. 박태준 사장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불꽃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고로 안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직원들의 발밑으로 황금빛 액체가 꾸물꾸물 모습을 드러냈다.
"나왔다! 나왔다!"
용광로보다 뜨거운 환호성이 공장 안을 가득 메웠다. 만세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박 사장도 두 팔을 힘차게 들어올렸다. '고로에 쇳물이 나오지 않으면 모두 영일만에 빠져 죽자'고 다짐했던 순간들이 직원들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검게 그을린 사내들의 얼굴에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산업의 쌀' 철강산업이 마침내 대한민국에서 근대화의 닻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포항종합제철(포스코의 옛 이름)이 설립된 것은 1968년 4월1일.5년여 만에 첫 쇳물을 뽑아내기까지 수많은 가시밭길을 헤쳐 나왔다. 설립 초기에는 뭐 하나 계획대로 풀리는 일이 없었다. 제철소 건설을 위한 3대 요소,자본ㆍ기술ㆍ자원 가운데 어느 것 하나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돈은 1966년 설립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으로부터 들어오기로 돼 있었다. KISA는 미국 웨스팅하우스 등 5개국 8개 회사로 구성된 민간기구.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금 조달 계획이 꼬이기 시작했다. 지원금 배분 문제로 티격태격하며 아까운 시간이 흘러가던 와중에 대형 악재가 터진 것.세계은행(IBRD)이 한국의 종합제철사업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담은 보고서를 내놨다.
결국 차관단은 손을 들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일부 국내 언론들까지 제철소 건설 계획을 비난하는 십자포화를 쏟아냈다. 한 신문은 사설을 통해 "국제경쟁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포항제철은) 장난감 같은 것"이라며 "부실기업을 하나 더 만드는 것밖에 안 된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박태준 사장이 당시 비밀리에 '회사정리계획'까지 짤 정도로 포항제철은 궁지에 몰렸다.
무슨 수라도 내야 했다. KISA만 믿고 포항벌 수백만평에 부지 조성을 시작했는데….박 사장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대일청구권 자금 가운데 1억달러를 제철소 건립 자금으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청와대에 보고했다. 하지만 걸림돌이 있었다. 대일청구자금에는 '농림수산업에만 투자한다'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던 것.일본 정ㆍ재계 인사를 하나하나 찾아나섰다. 그리고는 용도 변경에 동의해 달라고 설득했다. 마침내 1969년 12월3일 종합제철소 건설을 위한 한ㆍ일 기본협약이 체결됐다.
한 고비를 넘는가 했더니 또 다른 산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번에는 제철소를 짓기 위한 기술이 당면 과제로 떠올랐다. 당시 포항제철에는 제철소를 지어본 기술자는 고사하고 제철소를 직접 본 사람도 박태준 사장을 포함해 단 두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의지가 꺾이지는 않았다. 하나씩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일본 기술자를 불러 밤을 새워 기술을 전수받았다. 동시에 호주의 광산회사인 BHP빌리톤 등으로부터 원료를 들여오는 계약도 맺었다. 파리떼처럼 달려드는 정치권의 리베이트 압력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독대를 통해 정면돌파했다.
이렇게 어렵사리 탄생한 포스코는 포항에 이어 광양에도 제철소를 세우며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1968년 16억원으로 출발한 자산은 현재 30조원으로 1만9000배나 불었다. 쇳물이 나오기 시작한 1973년 416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액은 지난해 20조원을 웃돌며 530배나 증가했다. 고작 103만t이던 연간 조강생산량은 3300만t으로 늘어 세계 2위 철강회사로 우뚝 섰다.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광고 문구처럼 자동차 조선 전자 등 국내 주요 산업들이 성장하는 데도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포스코뿐만 아니다. 국내 다른 철강회사들 역시 숨가쁜 세월을 보냈다. 1978년 인천제철을 인수한 현대제철은 강원산업과 한보철강을 잇달아 사들이며 또 하나의 철강 신화를 쓰고 있다. 인천제철은 국내 최초 철강회사인 대한중공업공사를 모태로 한 기업.국내 철강역사의 적통(嫡統)을 현대제철이 잇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 전기로(電氣爐)에 치중하던 현대제철은 현재 충남 당진에 일관제철소를 짓고 있다. 2010년 말 연산 800만t 규모의 당진제철소가 완공되면 현대제철은 포스코에 이어 국내 두 번째 '고로 메이커'가 된다.
대한중공업공사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철강회사인 동국제강은 브라질에서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브라질 세아라주에 연간 조강생산량 600만t 규모의 고로를 짓기로 한 것.
포스코와 동국제강 등으로부터 열연강판을 받아 냉연제품을 만드는 철강기업들의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 동부제철은 전기로 건설을 계기로 최근 회사이름을 '동부제강'에서 '동부제철'로 바꿨고 현대하이스코와 유니온스틸 등 다른 냉연업체들도 지속적인 기술 개발과 투자를 진행 중이다.
현재 국내 연간 철강생산량은 5000만t 수준.현대제철의 당진제철소와 동부제철의 전기로가 가동되는 2010년에는 7000만t으로 불어나 인도를 제치고 세계 5위 철강국가로 올라서게 된다. 1981년 1000만t을 돌파한 이후 29년 만에 철강 생산량이 7배로 증가하는 셈이다. 세계 철강역사상 유례가 없는 성장속도다. '대한민국 철강군단'의 기적은 현재진행형이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
1973년 6월9일 오전 7시30분.포항제철소 제1고로가 내려다볼 수 있게 설계된 '제2주상(柱上)'에 임직원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숨죽여 용광로를 응시했다. "펑!" 굉음이 터졌다. 출선구를 뚫고 나온 오렌지색 섬광이 공장 지붕으로 치솟았다. 박태준 사장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불꽃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고로 안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직원들의 발밑으로 황금빛 액체가 꾸물꾸물 모습을 드러냈다.
"나왔다! 나왔다!"
용광로보다 뜨거운 환호성이 공장 안을 가득 메웠다. 만세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박 사장도 두 팔을 힘차게 들어올렸다. '고로에 쇳물이 나오지 않으면 모두 영일만에 빠져 죽자'고 다짐했던 순간들이 직원들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검게 그을린 사내들의 얼굴에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산업의 쌀' 철강산업이 마침내 대한민국에서 근대화의 닻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포항종합제철(포스코의 옛 이름)이 설립된 것은 1968년 4월1일.5년여 만에 첫 쇳물을 뽑아내기까지 수많은 가시밭길을 헤쳐 나왔다. 설립 초기에는 뭐 하나 계획대로 풀리는 일이 없었다. 제철소 건설을 위한 3대 요소,자본ㆍ기술ㆍ자원 가운데 어느 것 하나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돈은 1966년 설립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으로부터 들어오기로 돼 있었다. KISA는 미국 웨스팅하우스 등 5개국 8개 회사로 구성된 민간기구.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금 조달 계획이 꼬이기 시작했다. 지원금 배분 문제로 티격태격하며 아까운 시간이 흘러가던 와중에 대형 악재가 터진 것.세계은행(IBRD)이 한국의 종합제철사업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담은 보고서를 내놨다.
결국 차관단은 손을 들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일부 국내 언론들까지 제철소 건설 계획을 비난하는 십자포화를 쏟아냈다. 한 신문은 사설을 통해 "국제경쟁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포항제철은) 장난감 같은 것"이라며 "부실기업을 하나 더 만드는 것밖에 안 된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박태준 사장이 당시 비밀리에 '회사정리계획'까지 짤 정도로 포항제철은 궁지에 몰렸다.
무슨 수라도 내야 했다. KISA만 믿고 포항벌 수백만평에 부지 조성을 시작했는데….박 사장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대일청구권 자금 가운데 1억달러를 제철소 건립 자금으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청와대에 보고했다. 하지만 걸림돌이 있었다. 대일청구자금에는 '농림수산업에만 투자한다'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던 것.일본 정ㆍ재계 인사를 하나하나 찾아나섰다. 그리고는 용도 변경에 동의해 달라고 설득했다. 마침내 1969년 12월3일 종합제철소 건설을 위한 한ㆍ일 기본협약이 체결됐다.
한 고비를 넘는가 했더니 또 다른 산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번에는 제철소를 짓기 위한 기술이 당면 과제로 떠올랐다. 당시 포항제철에는 제철소를 지어본 기술자는 고사하고 제철소를 직접 본 사람도 박태준 사장을 포함해 단 두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의지가 꺾이지는 않았다. 하나씩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일본 기술자를 불러 밤을 새워 기술을 전수받았다. 동시에 호주의 광산회사인 BHP빌리톤 등으로부터 원료를 들여오는 계약도 맺었다. 파리떼처럼 달려드는 정치권의 리베이트 압력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독대를 통해 정면돌파했다.
이렇게 어렵사리 탄생한 포스코는 포항에 이어 광양에도 제철소를 세우며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1968년 16억원으로 출발한 자산은 현재 30조원으로 1만9000배나 불었다. 쇳물이 나오기 시작한 1973년 416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액은 지난해 20조원을 웃돌며 530배나 증가했다. 고작 103만t이던 연간 조강생산량은 3300만t으로 늘어 세계 2위 철강회사로 우뚝 섰다.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광고 문구처럼 자동차 조선 전자 등 국내 주요 산업들이 성장하는 데도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포스코뿐만 아니다. 국내 다른 철강회사들 역시 숨가쁜 세월을 보냈다. 1978년 인천제철을 인수한 현대제철은 강원산업과 한보철강을 잇달아 사들이며 또 하나의 철강 신화를 쓰고 있다. 인천제철은 국내 최초 철강회사인 대한중공업공사를 모태로 한 기업.국내 철강역사의 적통(嫡統)을 현대제철이 잇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 전기로(電氣爐)에 치중하던 현대제철은 현재 충남 당진에 일관제철소를 짓고 있다. 2010년 말 연산 800만t 규모의 당진제철소가 완공되면 현대제철은 포스코에 이어 국내 두 번째 '고로 메이커'가 된다.
대한중공업공사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철강회사인 동국제강은 브라질에서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브라질 세아라주에 연간 조강생산량 600만t 규모의 고로를 짓기로 한 것.
포스코와 동국제강 등으로부터 열연강판을 받아 냉연제품을 만드는 철강기업들의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 동부제철은 전기로 건설을 계기로 최근 회사이름을 '동부제강'에서 '동부제철'로 바꿨고 현대하이스코와 유니온스틸 등 다른 냉연업체들도 지속적인 기술 개발과 투자를 진행 중이다.
현재 국내 연간 철강생산량은 5000만t 수준.현대제철의 당진제철소와 동부제철의 전기로가 가동되는 2010년에는 7000만t으로 불어나 인도를 제치고 세계 5위 철강국가로 올라서게 된다. 1981년 1000만t을 돌파한 이후 29년 만에 철강 생산량이 7배로 증가하는 셈이다. 세계 철강역사상 유례가 없는 성장속도다. '대한민국 철강군단'의 기적은 현재진행형이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