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60년…도전의 순간들] (5) "3조3교대…밤엔 일본책 해독해가며 기술 익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포스코 신화'에는 수많은 '무명 용사'들이 숨어 있다. 박태준 명예회장의 지휘 아래 묵묵히 땀을 흘린 현장 근로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올해 초 포스코에서 정년퇴직한 전상호 명장(名匠ㆍ61)도 무명 용사 중 한 명이다. 전씨는 1973년 2월15일 포스코 기능직 1기로 입사해 35년간 철강 외길을 걸었다. 그의 삶이 곧 포스코 역사나 마찬가지다.
30여년 전 초창기 포스코의 근무환경은 어땠을까. 전씨는 "지금 생각하면 화가 날 정도"라며 웃었다. "그 당시 현장직 근로자들은 3조3교대로 근무를 했어요. 하루를 3등분해 계속 돌아가는 시스템이었죠.휴일이요? 당연히 없었죠."
일하면서 무엇이 가장 힘들었느냐는 질문에 '졸음'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때 모든 집들은 슬레이트 집이었어요. 여름이 되면 끔찍하게 더웠죠.야간 근무를 하는 날에는 낮에 밀린 잠을 보충해야 하는데 너무 더워서 잠을 자기 힘들었습니다. 근무하다 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가족들의 고생도 많았다. 남편이 낮에 집에서 잠을 자면 아내는 아이들을 둘러업고 은행이나 관공서 등 시원한 장소를 찾아 배회했다. 가장(家長)의 단잠을 조금이라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그 당시엔 포항제철만한 직장이 없었다. 그래서 행복했다고 전씨는 회상했다.
"포철 입사 전에는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일했는데 월급이 1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포철에 입사하니까 첫 월급으로 2만4000원을 주데요. 쌀 여섯 가마를 살 수 있는 돈이었어요. 거기에다 국영기업이라 망할 위험도 없고…."
신입사원들에 대한 대우가 좋은 만큼 교육과정은 혹독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집합교육을 받는 고단한 나날이 이어졌다. 일반 직원과 달리 신입사원들은 일요일 하루를 쉬었지만 그마저도 여유롭지 못했다. "휴일에 정신상태가 해이해질까봐 매주 월요일에 시험을 보는 거예요. 잔인할 정도로 철저했죠."
그 당시 포스코의 사정은 그만큼 절박했다. 제철 기술을 제대로 알고 있는 기술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변변한 교재도 찾기 힘들었다. "번역도 제대로 안 되는 일본 책을 놓고 더듬더듬 기술을 익혔어요. 이렇게 처음부터 모든 기술을 우리 힘으로 익힌 저력이 지금의 포스코를 만든 원천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화제를 박태준 명예회장으로 돌렸다. 전씨는 "현장 근로자들에게는 아버지 같았던 분이었다"고 설명했다. "포스코 역사를 다룬 책들을 보면 박 회장이 '조인트'를 까거나 지휘봉으로 등을 때렸다는 일화들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런 수난을 당한 사람들은 모두 간부들이었어요. 현장 근로자들에게는 늘 수고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어요. 등도 두드려주시고.말씀이 끝날 때까지 손도 놓지 않으셨어요. "
그렇다고 근무 규율이 느슨했던 것은 아니다. 잘못을 했을 때는 반드시 책임을 묻는 문화가 창업 초창기부터 뿌리 내려 있었다. '빨간 헬멧'제도가 대표적인 케이스.그는 "당시 불량이 나거나 작업시간을 못 맞추면 하얀 헬멧에 붉은 페인트를 칠한 '빨간 헬멧'을 쓰고 야간 작업을 하는 벌칙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전씨는 35년간의 포스코 생활을 마감하고 현재 포스코의 설비를 유지ㆍ보수하는 계열사인 포스렉의 이사로 근무 중이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용광로 주변을 맴돈다. "옛날부터 철을 지배한 나라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그랬잖아요. 포스코가 대한민국을 세계 최고의 나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를 늘 기도합니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
올해 초 포스코에서 정년퇴직한 전상호 명장(名匠ㆍ61)도 무명 용사 중 한 명이다. 전씨는 1973년 2월15일 포스코 기능직 1기로 입사해 35년간 철강 외길을 걸었다. 그의 삶이 곧 포스코 역사나 마찬가지다.
30여년 전 초창기 포스코의 근무환경은 어땠을까. 전씨는 "지금 생각하면 화가 날 정도"라며 웃었다. "그 당시 현장직 근로자들은 3조3교대로 근무를 했어요. 하루를 3등분해 계속 돌아가는 시스템이었죠.휴일이요? 당연히 없었죠."
일하면서 무엇이 가장 힘들었느냐는 질문에 '졸음'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때 모든 집들은 슬레이트 집이었어요. 여름이 되면 끔찍하게 더웠죠.야간 근무를 하는 날에는 낮에 밀린 잠을 보충해야 하는데 너무 더워서 잠을 자기 힘들었습니다. 근무하다 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가족들의 고생도 많았다. 남편이 낮에 집에서 잠을 자면 아내는 아이들을 둘러업고 은행이나 관공서 등 시원한 장소를 찾아 배회했다. 가장(家長)의 단잠을 조금이라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그 당시엔 포항제철만한 직장이 없었다. 그래서 행복했다고 전씨는 회상했다.
"포철 입사 전에는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일했는데 월급이 1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포철에 입사하니까 첫 월급으로 2만4000원을 주데요. 쌀 여섯 가마를 살 수 있는 돈이었어요. 거기에다 국영기업이라 망할 위험도 없고…."
신입사원들에 대한 대우가 좋은 만큼 교육과정은 혹독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집합교육을 받는 고단한 나날이 이어졌다. 일반 직원과 달리 신입사원들은 일요일 하루를 쉬었지만 그마저도 여유롭지 못했다. "휴일에 정신상태가 해이해질까봐 매주 월요일에 시험을 보는 거예요. 잔인할 정도로 철저했죠."
그 당시 포스코의 사정은 그만큼 절박했다. 제철 기술을 제대로 알고 있는 기술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변변한 교재도 찾기 힘들었다. "번역도 제대로 안 되는 일본 책을 놓고 더듬더듬 기술을 익혔어요. 이렇게 처음부터 모든 기술을 우리 힘으로 익힌 저력이 지금의 포스코를 만든 원천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화제를 박태준 명예회장으로 돌렸다. 전씨는 "현장 근로자들에게는 아버지 같았던 분이었다"고 설명했다. "포스코 역사를 다룬 책들을 보면 박 회장이 '조인트'를 까거나 지휘봉으로 등을 때렸다는 일화들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런 수난을 당한 사람들은 모두 간부들이었어요. 현장 근로자들에게는 늘 수고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어요. 등도 두드려주시고.말씀이 끝날 때까지 손도 놓지 않으셨어요. "
그렇다고 근무 규율이 느슨했던 것은 아니다. 잘못을 했을 때는 반드시 책임을 묻는 문화가 창업 초창기부터 뿌리 내려 있었다. '빨간 헬멧'제도가 대표적인 케이스.그는 "당시 불량이 나거나 작업시간을 못 맞추면 하얀 헬멧에 붉은 페인트를 칠한 '빨간 헬멧'을 쓰고 야간 작업을 하는 벌칙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전씨는 35년간의 포스코 생활을 마감하고 현재 포스코의 설비를 유지ㆍ보수하는 계열사인 포스렉의 이사로 근무 중이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용광로 주변을 맴돈다. "옛날부터 철을 지배한 나라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그랬잖아요. 포스코가 대한민국을 세계 최고의 나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를 늘 기도합니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