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년 3월23일 울산 미포만 백사장.'펑! 펑! 펑!'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울산 현대조선소 착공을 알리는 발파 버튼을 누르자 굉음이 울려 퍼졌다. '단군 이래 최대 역사'로 불린 현대조선소가 기공되는 현장이자 한국 경제가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 뛰어드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주한 각국 대사,울산 시민 등 5000여명이 감격의 순간을 함께했다.

조선소 착공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의 과정은 그야말로 험난했다. 착공식이 열리기 2년 반 전인 1969년 10월.온 나라가 들썩였다. 아니 '난리'가 났다. 현대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독자적인 조선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나섰기 때문.

정부의 한 고위 관료는 "현대가 조선사업에 성공하면 내 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올라가겠다"고 비아냥거렸다. 재계 안팎에서도 "3ㆍ1빌딩(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빌딩)보다 큰 선박을 만들겠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회의적 반응이 쏟아졌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단호했다. 그는 당시 "난 설계나 용접에 자신 있는 건설업자"라며 "뭐가 어렵겠느냐"고 반문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1970년 정 회장은 조선업 진출에 필요한 차관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 런던으로 날아갔다. 독일(당시 서독)에서는 "목선(木船)이나 만들라"는 냉대까지 받은 터였다.

그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A&P 애들도어'라는 금융회사의 찰스 브룩 롱바텀 회장을 만났다. 정 회장은 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거북선이 그려진 쪽을 펴 보이며 "우리는 벌써 1500년대에 이런 철갑선을 만들어 일본을 혼낸 민족이오"라고 말했다.

롱바텀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조건을 달았다. 한국에 배를 주문하겠다는 선사를 찾아오면 돈을 빌려 주겠다는 것.정 회장은 울산 미포만의 황량한 백사장 사진과 50만분의 1짜리 지도 한 장,그리고 외국 조선사에서 빌린 26만t짜리 유조선 도면만을 들고 선주들을 찾아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1971년 말 그리스 해운회사 리바노스사(社)로부터 26만t짜리 초대형 유조선(VLCC) 두 척을 수주했다.

현대중공업은 1983년 뜻깊은 한 해를 맞는다.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제치고 설립 10년 만에 세계 1위의 조선업체로 올라선 것이다.

2004년 7월엔 세계 조선 역사를 다시 한번 바꿨다. 당시 현대중공업은 러시아 측으로부터 원유 운반선을 제작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지만 울산조선소의 도크는 이미 꽉 차 있는 상태였다.

이때 등장한 아이디어가 바로 육상 건조법.당시만 해도 도크 없이 육상에서 대형 선박을 건조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대중공업은 업계의 통념을 무릅쓰고 선박 밑에 레일을 깔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바다로 띄우는 데 성공했다.

세계 1위 조선사인 현대중공업은 올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전북 군산조선소 착공식을 갖고 서해안 지역에 첫 대형 조선소 건설에 들어간 것.군산조선소 역시 '땅 파기와 선박 건조'를 동시에 진행한다는 점에서 40년 전의 울산조선소 건설 신화를 재현하고 있다.

한국의 조선 신화에는 현대중공업만 있는 게 아니다. '삼성이 하면 뭐든 된다'는 당시의 암묵적 공식은 조선사업에서도 통했다. 1973년 3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지시로 비서실에 중공업 사업부가 설치돼 조선소 건설 후보지 물색 작업에 들어갔다. 같은 해 11월 삼성은 '제3 대단위 조선소 실수요자'로 확정되면서 역사적인 출범의 돛을 올렸다.

삼성중공업은 1989년과 1992년 1도크와 2도크를 확장해 연간 총 건조능력을 60만t으로 확대했다. 1994년에는 3도크 준공으로 연간 180만t의 건조능력을 갖추며 세계 3대 조선소로 부상했다. 2003년 이후에는 전 세계에서 발주된 LNG선의 30~40%를 수주하며 세계 조선시장의 선두 주자로 올라섰다.

대우조선해양도 국내 조선사(史)에서 빼놓을 수 없다. 1978년 8월 경제장관 협의회에서 대우그룹의 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 인수를 정식 의결하면서 대우조선해양의 역사는 시작됐다. 온갖 난관을 뚫고 1981년 9월 골리앗 크레인 설치를 완료함으로써 옥포조선소 건설을 마무리했다.

후발 조선업체인 대우조선해양의 성장 과정은 더 험난했다. 1980년대 후반 지독한 노사 분규를 겪으면서 위기를 맞았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직접 옥포조선소에 머물며 현장 경영을 펼쳐 간신히 조선소를 지켜 냈다. 1990년대 초반 이후 VLCC의 경쟁력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이며 전 세계 시장의 25%를 장악했다. 1993년엔 잠수함도 건조하기 시작했다. 이후 고부가가치 선박인 LNG선 수주를 늘리며 세계 3대 조선사로 우뚝 섰다.

STX조선과 한진중공업도 각각 인수ㆍ합병(M&A) 및 해외 조선소 건설로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고 있다. STX는 2002년 대동조선을 인수하면서 단숨에 세계 5위의 조선소로 도약했다. STX는 올해 세계 2위 크루즈 선사인 노르웨이의 아커야즈사(社)를 인수하면서 2012년까지 세계 최대 규모 조선그룹으로 도약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한국 조선업계의 '종갓집'인 한진중공업은 1937년 부산 영도에 한국 첫 조선소를 지은 이후 국내 첫 LNG선을 건조하는 등 국내 조선산업의 역사를 써내려 왔다. 그러나 8만평에 불과한 영도조선소 부지 면적이 사업 확장의 발목을 잡았다. 한진중공업은 이런 '한(恨)'을 최근 필리핀 수비크 만에서 풀었다. 70만평 규모의 수비크 조선소에 두 개의 도크를 들여놓고 세계 최고를 향해 뛰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 조선업계의 이 같은 신화는 '숫자'로도 명쾌하게 증명된다. 지난해 기준으로 한국 조선산업은 '수주량ㆍ건조량ㆍ수주잔량' 등 조선 3대 지표를 모두 석권하며 '조선강국 코리아'의 위용을 유감 없이 과시하고 있다. 수주 700억달러,수출은 270억달러에 달한다. 25년째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조선소마다 3~4년치의 일감이 쌓여 있을 정도다. 구본성 한국조선협회 과장은 "국내 조선업계는 LNG선을 비롯 심해 유전을 개발할 수 있는 드릴 십 등의 고부가가치 선박 수주를 계속 늘려 세계 1위의 자리를 지켜 낼 것"이라고 말했다.

장창민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