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모임에서 만난 중ㆍ소형 증권사 A사의 전문경영인 사장은 근황을 묻자 이렇게 고충을 털어놓았다.

"요즘은 늘 그룹 회장에게 꾸중을 듣습니다. 최근 10년 사이에 거대한 금융그룹으로 큰 신생사도 있는데 그동안 뭘 했느냐는 질책이죠.그렇지만 그 회사는 오너가 직접 판단을 내리고 밀어붙이는 데 우리가 따라갈 도리가 있나요. "

옆자리에 있던 같은 중소형 회사인 B사의 오너 사장이 말을 이었다. "오너라고 별 수가 없어요. 경쟁은 치열하고 업계 환경은 나날이 바뀌니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막막해요. 대형사에 밀리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온라인으로 주식매매시장에서 점유율을 10%로 끌어올리는 증권사가 나오는데도 뾰족한 돌파구가 없으니 걱정입니다. "

증권업이 유망하다지만 대화에서 보듯 정작 경영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유동성 확보는 다른 회사에도 큰 과제지만,증권사는 주가 하락과 신용 위험에도 대비해야 하는 특성이 있다. 더욱이 좁은 국내 시장에서 8개사가 새로 탄생해 총 62개사가 내년 2월부터 시행되는 자본시장통합법에 따라 '금융투자회사'로 탈바꿈해야 하는 상황인 만큼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이 뻔하다.

리스크를 안고 투자수익을 추구하는 자본시장의 특성상 증권업은 철저한 리스크 관리와 고객의 신뢰가 뒷받침돼야 한다. 지난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쓰러진 미국 투자은행(IB) 베어스턴스 사례에서 보듯 감당할 수 있는 리스크를 넘어 무리하게 공격경영에 나설 경우엔 회사의 존폐까지 위협받게 된다. 사람으로 치면 건강관리와 마찬가지다.

리스크 관리에 너무 신경쓰다 보면 소극적이 돼 그만큼 수익이 줄어든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조금만 길게 내다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증권사의 리스크 관리 강화는 투자자들의 이익 보호로 이어지고,이는 고객의 신뢰를 높이는 계기가 되는 법이다.

지난해 7월 코스피지수가 2000선까지 급등했던 과정에서 투자자들이 증권사에서 돈을 빌려 투자하는 신용융자가 크게 늘었다. 당시 한 대형 증권사는 지수 1800선에서 미리 신용융자 줄이기에 나섰다. 일선 지점장들은 신용융자를 해달라는 투자자들의 요청이 빗발치는데 어떻게 영업을 하라는 것이냐며 불만을 쏟아냈다. 그러나 2~3개월 후 주가가 조정국면으로 돌아서자 상황은 정반대가 됐다. 다른 증권사들은 고객들이 빌린 돈을 까먹어 곤욕을 치렀지만 이 증권사 고객들은 큰 피해를 보지 않고 넘어가 오히려 나중엔 회사 측에 고마워했다는 후문이다.

대형 증권사들마다 자통법 시행을 앞두고 '한국판' 골드만삭스와 메릴린치를 꿈꾸고 있다. 단순한 위탁매매 비중을 줄이고 자산관리,자기자본투자,투자은행 업무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국내시장을 넘어 아시아 등 해외시장으로 나가는 것은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게 마련이다. 여기에 앞으로는 증권사들이 인수합병(M&A)을 중개하는 과정에서 인수기업에 일시적으로 부족한 자금을 융통해주는 '브리지론'과 지급보증까지 할 수 있게 된다. 고수익을 올리려면 위험도 커지게 마련이다. 증권사들의 리스크 관리가 절실한 이유다.

손희식 증권부 차장 hssoh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