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월3일은 한국 증시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 된 날이다. 외국인의 주식투자를 허용하는 시장개방으로 한국증시는 비로소 세계로 나왔다. 주가는 증시개방 원년 첫날을 자축하듯 624.23으로 2.1% 올랐다.


이날 증시를 지켜보던 당시 정덕구 증권제도과장(전 산자부 장관)과 전홍열 사무관(전 금감원 부원장ㆍ현 김&장 법률사무소 고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 과장을 팀장으로 TF를 구성해 2년여 동안 공들여 추진했던 자본시장 개방이 순조롭게 출발했기 때문이다.

전홍렬 고문은 "당시 증시개방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다"고 회고했다. "일각에서는 '외국자본이 우리 기간산업과 주요 기업들을 싹쓸이하지 않겠느냐'는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1989년 3월 주가가 1000포인트를 넘은 만큼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밀어붙였다. 오히려 당시 한국증시는 외국인에게 변두리시장이어서 개방해도 실제 외국인이 얼마나 주식을 사러 들어올지 내심 걱정했었다. "

전 고문은 당초보다 증시개방 폭과 시기가 크게 앞당겨졌다고 말했다. "기업 경영권 문제 등을 감안해 당초에는 최대 개방폭을 25%로 생각했고 완전개방되려면 10∼2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1997년 말 외환위기라는 사상초유의 비상사태가 터져 1998년 5월에 시장이 완전 개방됐다"고 말했다.

한국증시의 역사는 1956년 3월 명동에 증권거래소가 세워지면서 시작됐다. 이 '명동시대'는 1979년 거래소가 여의도로 이전하기까지 23년간 이어졌다.

명동시대 주식거래는 모두 수작업으로 처리됐다. 고객은 주식매매를 주문하고 거래가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기까지 최소 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매매계약 체결은 거래소 방송을 통해 공지됐다.

초창기에는 기업들이 상장을 꺼리기도 했다. 이에 따라 박정희 정부는 1968년 자본시장육성법,1972년 기업공개 촉진법을 제정해 기업들의 상장을 유도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1956년 12개뿐이었던 상장회사가 1968년 34개,1974년 104개로 급증했다.

명동시대의 총 주식거래대금은 5조3700억원,거래량은 230억6000만주였다. 요즘으로 치면 거래대금은 하루치,거래량은 1주일치 수준이다.

우리 증시는 숱한 부침을 겪었고 사고도 많았다.

초창기에는 주식매매 2개월 후에 자금을 결제하는 청산거래방식이어서 투기적 거래가 성행했다. 1958년 '1ㆍ16 국채파동',1965년 '증권파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70년대엔 1978년 '건설주 파동'이 일어 투자자들이 거래소와 증권사를 찾아 격렬히 항의하는 일이 속출했다. 당시 증권사 지점장이 자살하고 실직자들이 쏟아지는 등 큰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건설주 파동을 겪은 한국증시는 유가ㆍ금리ㆍ달러가치 하락이라는 '3저현상'에 힘입어 1985년을 분기점으로 활황을 맞았다. 1985년 말 163.37이었던 종합주가지수는 1989년 3월 처음으로 1000포인트를 돌파했다.

그러나 주가는 1989년 하반기부터 급전직하해 1990년 9월에는 566포인트로 거의 반토막이 됐다. 신용융자를 얻어 투자했던 개인들 가운데는 보유주식을 팔아도 증권사로부터 빌린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이른바 '깡통계좌'가 속출했다. 이 때문에 많은 투자자들이 큰 손해를 보고 증시를 떠났다. 이후에도 증시는 1999년 벤처거품으로 코스닥 주가가 반토막 아래로 추락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증시개방을 계기로 투자관행과 기업경영은 크게 달라졌다. 1992년 개방당시 증시의 주도주는 건설ㆍ금융ㆍ무역 등 이른바 '트로이카주' 였다. 그러나 외국인들은 빗장이 풀리자 한국증시에서 태광산업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신영(현 신영와코루) 대한화섬 등 PER(주가수익비율)가 낮은 주식을 싹쓸이하다시피 사들였다. 이 때문에 일부 종목은 주가가 5∼10배 이상 치솟았다. 당시 증시에는 이를 '저(低) PER주 혁명'이라고 불렀다. 신성호 증권업협회 상무(당시 대우투자자문 연구원)는 "그때는 무명인 태광산업의 시총이 현대자동차를 추월해 동료들과 어느 기업이 더 나은지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기업들도 달라졌다. 외국인들의 주주가치 중시정책을 의식,배당과 ROE(자기자본이익률)를 높이고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큰 숙제가 됐다.

외국인은 뚜렷한 기관투자가가 없던 한국증시를 좌지우지했다. 외국인이 사는 종목은 오르고 파는 종목은 내렸다.

이런 상황은 2005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외국인은 2005년 한국증시에서 3조229억원어치를 팔았지만 주가(코스피지수)는 오히려 53%나 올랐다. 기관이 7조6737억원의 주식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이후 외국인들은 2006년 10조원,2007년 24조원,올해 22조원의 매물을 쏟아내면서 오히려 한국증시의 최대 매도세력이 됐다. 특히 올 들어서는 공매도로 증시하락을 부채질하고 있다.

대신 기관이 증시의 새로운 버팀목으로 부상했다. 여기에는 2005년부터 불어닥친 펀드투자 열풍이 든든한 배경이다. 2004년 말 8조5520억원 수준이었던 주식형펀드는 적립식 펀드가 대중화되면서 지난달 말에는 143조원까지 급증했다. 주식형펀드 계좌 수는 1817만개로 늘어 '1가구 1펀드 시대'가 열렸다.

강창희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장은 "일본도 1990년대 초 외국인이 공매도 공세로 주가 하락을 가속화시켜 투자자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며 "이에 비하면 외국인 매도에 맞서고 있는 현 한국증시의 체력은 놀라운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김태완 기자 tw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