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도 '올림픽 3대 불가론'이 대세였지요.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국민 화합'이 안 된다는 것이 첫째,아웅산참사 및 KAL기 폭파 등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안전'문제가 둘째,올림픽기간에 태풍이 올 가능성이 높다는 '날씨' 문제가 셋째였지요. "

박세직 88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75·현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분위기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는 "오죽했으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한 위원조차도 이미 유치가 결정된 서울 대신 LA나 뮌헨을 대체지로 선정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겠습니까"라고 회고했다. 무엇보다 듣기 싫었던 말은 '한국인은 어쩔 수 없어''한국은 안 돼' 하는 우리 스스로의 자조의식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우리는 1970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해 놓고도 반납한 전력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미 유치한 올림픽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신인도는 어떻게 되겠어요. 올림픽을 반대하던 운동권 학생,정치인,각국 국가올림픽위원회 위원,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 등을 만나 설득했습니다. 모스크바와 LA대회가 '반쪽 대회'였는데 서울대회는 온전하게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지요. 우려와는 달리 서울올림픽은 역대 올림픽 가운데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

경기 정시진행률은 98%로 역대 개최도시 가운데 2위였던 뮌헨(92%)을 월등히 앞질렀다. 사마란치 위원장도 당시 "올림픽 100년 사상 가장 훌륭한 대회였다"고 분석했다.

최근 조사에서는 가장 인상 깊은 올림픽으로 4년 전 열린 아테네대회가 1위로 꼽히고,서울대회는 2위에 랭크됐는데 아테네는 올림픽의 발상지라는 특수사정이 감안된 결과다. 당시까지 유명무실했던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을 하계올림픽과 동시에 열게 하는 전환점을 마련한 것도 큰 공헌이다.

올림픽 효과는 예상대로 엄청났다. '서울'과 '코리아'의 브랜드 가치는 높아졌고,개도국 제품으로 외면받았던 한국상품도 제값을 받고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한 기업인이 동구권 국가에 들어갔는데 당시만 해도 입국절차가 까다로웠다고 해요. 그런데 양복에 붙은 '호돌이' 배지를 세관원이 알아보고는 '서울 넘버 원'이라며 통과시켜 주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또 외국으로 시집간 한국여성들로부터도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 "시댁 식구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는데 한국이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나니까 그들이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며 조국에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었어요. "

글=김경수 기자 ksmk@hankyung.com

사진=양윤모 기자 yoonm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