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 '반구정 나루터집'



무더위 속에 쏟아지는 땀이 온몸의 기를 함께 빼내는 것 같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도 오래 쐬면 머리가 아프고,하루에 몇 번씩 샤워를 해대도 몸이 끈적거려 마음까지 불쾌해진다. 딱히 입맛이 없어 식사도 부실하게 했더니 병든 닭이 따로 없다.

기를 충전해야 남은 여름을 버텨내고 일도 열심히 할 듯 싶어 식구 모두 즐길 수 있는 보양식을 탐하러 가기로 했다. 여름 보양식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메뉴는 보신탕과 삼계탕,그리고 장어 세 가지일 게다. 보신탕은 나도 별로 탐탁지 않고 딸아이도 난리여서 우선 제외하고(영국인 남편 앤디씨는 의외로 개고기를 좋아하지만),삼계탕은 평소 자주 먹으니 식상하다 싶어 장어로 결정했다.

장어로 유명한 지역은 꽤 있지만 서울 근교에서 제대로 된 장어구이를 내는 식당들은 죄다 여기 모인 것 같은 동네가 있다. 파주시에 위치한 반구정으로,엄밀히 말하자면 임진강변을 끼고 있는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로 가면 된다. 자유로를 타고 가다 당동IC로 빠져 나와 좌회전하면 눈앞에 장어식당 간판들이 펼쳐진다.

우선 식사 전,이 동네를 유명하게 만든 반구정부터 먼저 들러보기로 했다. 세종 때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생을 마감한 곳을 유적지로 만들었고,그 안에 정자인 반구정이 있다. 입장료도 저렴하고,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며 한 시간 정도 걸어 돌아 다니기엔 매우 한적하고 청아하다. 정자에 서서 석양이 지는 임진강을 바라보면 마음이 절로 평온해진다. 물론 저마다의 느낌과 생각이 달라,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라도 각기 다른 추억을 간직하며 산다고 하지 않던가. 사실 이 유적지는 가족보다는 연인들에게 더 어울리는 운치 있고 한가로운 장소다. 아이들이 너무 어리면 황희 정승 유적지보다는 근처 평화랜드를 추천한다. 붐비지 않고 놀이기구뿐 아니라 체험관도 마련돼 있어 아이와 함께 반나절 이상 시간을 보낼 만하다.

황희 정승 유적지 옆,같은 곳인지 헷갈릴 정도로 바로 옆에 커다란 한옥으로 지은 장어구이 전문식당이 있다. 장어 마니아들은 반구정 일대에서 비슷한 상호를 쓰는 식당들 가운데 이곳 '반구정 나루터집'(031-952-3472)을 제일로 알아준다고 한다. 이는 주차장에 세워진 자동차 숫자만 봐도 짐작할 수 있겠다. 공휴일이나 주말에는 번호표를 받고 한 시간 이상은 기다려야 되기에 참고해야 할 것이다.

1000평이 넘는 넓은 실내와 야외 어느 곳이든 빈 자리가 있으면 앉는 것이 상책.저녁에는 야외 마당에 좍 펼쳐 놓은 평상에 앉아 버드나무 밑의 석양을 병풍 삼아 장어를 탐하는 것이 꽤 낭만적이다. 자리를 잡고 앉으면 숯불로 굽는 장어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주문을 마치면 장정 두 사람이 상을 들고 와 앞에 놓아 준다. 짜지 않은 동치미,콩나물이며 무 생채 무침,고추절임과 김치 등의 밑반찬들은 그저 수수하다. 곧 이어 나온 장어를 입에 넣었다. 숯불 향과 더불어 소스의 감칠 맛과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비리거나 느끼해서 서너 점 이상은 안 먹는 나도 1인분(2만1000원)을 해치웠다. 그냥 먹다가 때로는 깻잎에 생강 편을 넣고 싸서 먹다 보니,세 명이 장어 3인분을 게눈 감추듯 해치웠다. 그래서 메기 매운탕 작은 것(小 3만원)을 시켜 식사를 했는데,장어구이에서 느꼈던 희열만큼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충실한 맛을 전해줬다. 스시를 좋아하는 딸은 장어 스시는 절대로 안 건드리는데,이번에 장어에 대한 선입관이 바뀐 것 같았다.

장어는 생선이지만 양념을 발라 숯불에 굽는 조리법 때문에 미디엄 보디(medium body)의 오크 숙성 레드와인도 잘 어울린다.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아 국내에서도 인기 있는 칠레산 '카시제로 델 디아블로'(Casillero del Diablo·2만2000원)와 함께 즐길 만하다. 워낙 맛있는 와인이라 일꾼들이 몰래 창고에서 훔쳐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와이너리 오너가 '악마의 셀러'라고 소문을 내고 악마 분장을 해 도둑을 막았던 데서 붙여진 이름의 와인이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체리가 들어 있는 초콜릿 향이 진하게 풍기면서도 타닌이 강하지 않고 부드럽다. 와인의 오크 향과 뒤끝에 남는 단내가 장어구이의 숯불 향,양념 맛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장어와 카시제로 델 디아블로'로 마지막 남은 8월을 악마처럼 강하게 견뎌내면 어떨까?

식문화 컨설턴트 toptable22@naver.com/사진=김진화 푸드 포토그래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