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vo! My life] '장맛'과 결혼한 이 남자, 정연수 말표산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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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말일지 모르지만 좋은 장(醬)을 담그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해야 하고 장을 담가놓고도 최소 3년간은 계속 자식처럼 아껴줘야 하죠."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삼성리에 있는 수진원(修眞園) 농장에서 만난 구두약 전문업체 말표산업의 정연수 대표(57)는 "장 담그는 것이 간단해 보여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며 이같이 말했다.
수진원 농장은 정 대표의 부친인 말표산업 창업자 정두화씨(2006년 작고)가 일궜다. 사라져 가는 전통 장류를 안타까워 한 나머지 1970년대 초 본인이 직접 땅을 매입,개간했다. 여기서는 직접 재배한 국산 콩에 3년 이상 묵혀 간수를 완전히 뺀 천일염과 지하 200m에서 끌어올린 지하수를 써서 된장 고추장 간장을 담근다. 장맛도 뛰어나 궁중요리 연구가 황혜성씨(2006년 작고)가 이곳에 장독을 놓아 달라고 했을 정도다. 지난해에는 허영만씨의 만화 '식객' 18권에 소개되기도 했다.
2006년부터는 정 대표가 농장 경영을 맡아 전통 장류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인천 남동구에 있는 말표산업 본사에서 일하고 주말이면 수진원에 머문다. 그는 "장독 하나하나에 볕을 쪼이고 닦아줘야 한다"며 "주중에 회삿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쉬어갈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정 대표가 장류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대학생 때(동국대 과학교육학과 70학번) 아버지가 무서워 주말이면 강제로 끌려오다시피 해서 농장을 만들었는데 당시에는 정말 싫었다"며 "그런데 강제로라도 하다보니까 장 담그는 것에 점차 희열을 느끼게 되더라"고 말했다. 그는 명인으로 유명하던 아버지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아 전통 장맛을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다.
정 대표는 전통 장류 알리기에도 열성이다. 장 담그는 법을 알리기 위해 농장 안에 교육장도 만들 생각이다. 장은 보통 음력 정월 '말날'(午日·달력의 십이간지가 말(午)인 날)에 담근다. "다른 날에도 담가봤지만 이상하게 말날이 아니면 장맛이 시원찮다"며 "장이 갖고 있는 일종의 신비"라고 그는 말했다. 장을 담근 후에는 몇 달간 숙성시킨 후 간장을 따라내고 된장을 만든다. 된장은 3년 이상,간장은 5년 이상 숙성시킨다. 정 대표는 "된장은 3년,간장은 5년에서 10년 된 것이 가장 맛이 좋다"며 "옛날에는 왕들도 10년 된 간장을 먹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몇 십년 된 간장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약이지 음식이라고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장을 담근 후에는 최소 3년간 장독 관리에 신경을 쓴다. 비를 안맞게 볕을 쪼여주고 통풍이 잘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정 대표의 설명.그래서 수진원의 장독들은 뚜껑이 보통 옹기뚜껑이 아닌 옆면에 구멍이 뚫린 유리뚜껑이 덮여 있다.
그는 "뚝배기보다 장맛이라고 옹기뚜껑이 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통풍이나 채광에서 유리뚜껑이 좋은 장맛을 내기에 더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장독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물로 닦아준다. 독이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700개의 독은 크기나 모양이 모두 제각각"이라며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유약을 쓰지 않고 만든 '숨쉬는 독'을 구했다"고 설명했다.
정 대표는 여름철이면 농삿일에 바쁘다. 내년에 장 담글 콩을 가꿔야 하기 때문이다. 농약이나 비료는 절대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는 "6만6000㎡나 되는 콩밭을 일일이 손으로 김매는 것이 힘들지만 장맛을 위해서라면 포기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정 대표가 이처럼 정성을 들여 장을 담그는 것은 돈을 보고하는 일이 아니다. 농장에서는 직접 담근 장류를 판매하지만 일절 광고를 하지 않는다. 입소문을 타고 찾아오는 사람들 뿐이다. 때문에 매년 1억원 정도의 적자를 보고 있다. LG와 롯데 측으로부터 수진원의 장류를 대량 유통시키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모두 거절했다고 말했다. "대량 유통을 하려면 많이 만들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마진 때문에 장맛이 변한다"며 "장을 만들어 장사할 생각은 없다. 전통을 지켜 나가는 것이 우선"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이런 정 대표를 놓고 주위에선 '전통 장과 결혼한 남자'라고 부른다.
정 대표는 주말에는 농장에서 장독들을 돌보면서 사업 구상도 함께 한다. 1955년 창업한 말표산업은 매년 약 1000만개의 구두약을 생산,연간 18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최근에는 유기발광다이오드 원료를 생산해 국내외에 공급하고 있다. 그는 "서울사람이라 시골이 싫었는데 이젠 시골이 더 좋은 것을 보니 피는 못 속이는 것 같다"며 "전통 장류의 맥을 이어가기 위해 무슨 일이 있어도 농장은 꼭 지킬 생각"이라고 말했다.
글=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
사진=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