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화 <전남대 교수ㆍ경제학>

'우리사회가 여러 분야에서 몸살을 앓고 있고 세계는 격동적인 변화가 소용돌이 치고 있는데 국회가 상임위원회도 구성하지 못하고 산적한 현안들을 한번도 논의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실질적인 헌정 부재 상태와 의회민주주의의 위기상황까지 다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감마저 든다는 것이 본인의 솔직한 심정이다. '

이것은 최근의 국회를 두고 하는 말 같지만 실은 지난 14대 국회의 원 구성이 늦어지자 국회의장이 국회의원에게 발송한 서한의 일부 내용이다. 당시 국회는 임기 시작 한 달이 돼서야 정ㆍ부의장 선거를 했고,10월에 가서야 겨우 상임위원장 선거를 마칠 수 있었다. 이번 18대 국회도 원구성이 미뤄진 일수로 보면 14대 국회에 버금갈 것 같다. 의원의 임기가 시작된 지 석 달 가까이 지나서야 겨우 원 구성을 합의했기 때문이다.

국회의 원 구성 지연은 매번 되풀이되는 사실상 '불법파업'이다. 1994년에 국회의 원구성이 지연되지 않도록 국회법을 개정해 원 구성을 법제화했다. 국회법에 따르면 의원의 임기개시 7일에 임시회를 소집해야 하고 정ㆍ부의장을 비롯해 상임위원장을 선출해야 한다. 그리고 6월30일까지는 당해연도 국회운영 기본일정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국회 스스로 이를 지킨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국회가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불법파업'을 벌이는 데는 매번 이유가 있었다. 이번은 광우병 파동으로 인한 가축전염병 예방법 개정 때문이었다. 국민의 건강이 중요한 것은 틀림없고,이를 위해 가축전염병 예방법을 개정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일에도 순서가 있고,시급을 다퉈야 하는 문제가 있다.

눈에 보이는 건강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건강이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질병은 누구나 조심하기 때문에 치명적이더라도 피해는 한정된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은 환자가 깨닫기 전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이를 깨달았을 때는 병이 널리 퍼져 있을 때가 많다. 현재 우리 경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중증 환자 신세다.

고유가로 인해 물가는 급등하고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 우려된다. 이로 인해 서민 고통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책은 시간을 다투는 것이고 정치적 논쟁의 소지도 적다. 하지만 국회의 원구성이 늦어져 각종 에너지 대책이나 서민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추가경정 예산안이 두 달 가까이 계류돼 있다. 실기한 정책은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오히려 시차로 인해 부작용만 늘어날 수 있다.

근로자의 불법파업이 길어지면,국회의원들도 경제적 손실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그리고 불법 파업에 대해 근로자들은 각종 민형사 책임을 진다. 하지만 국회의 사실상 장기 '불법파업'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국회의원들은 없다. 일부 국회의원들이 세비를 반납하기는 했지만,정책의 지연에 따른 막대한 손실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 한마디 하는 국회의원은 없는 것 같다.

국회의 문제는 국회 스스로 풀어가는 수밖에 없다. 합리적 대안을 추구하는 국회의원들이 모여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국회운영에 대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 야당도 개원협상을 투쟁전략으로 삼는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고쳐야 한다. 국민과 소통하는 수단이 제한됐을 때 국회 '파업'은 자신의 입장을 알리는 강력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국회의원의 장외투쟁이나 '불법파업'을 찬성하는 국민들은 많지 않다. 평소 국회의 정쟁에 염증을 느끼는 일부 국민에게 국회 '파업'이 오히려 편안함을 주었다는 냉소적인 시각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